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Fifty Shades Of Grey 2015>를 보게 된 건,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제가 평소 좋아하는 엘리 굴딩(Ellie Goulding)의 ‘Love Me Like You Do’ 때문이었지만, 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에 나오는 이 문장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가 필라에게 반 것은 그녀의 육체 때문도 정신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뭘까? 모든 것이 그에게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무엇이 그를 여기에 붙잡아 두는 것일까? 어쩌면 필라가 그를 바라보는 눈길, 그 강렬한 시선, 그의 말에 귀 기울일 때 넋을 잃고 몰입한 눈빛, 그들이 함께 있을 때면 그녀가 그 자리에 온전히 있다는 느낌, 지구상에서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밖에 없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몰랐다."
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배우 다코타 존슨)과 크리스 그레이(배우 제이미 도넌)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논란이 많았던 원작 소설이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는 소식, 호불호가 갈리는 장면들이 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는 평이 있지만, 저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영화에서 눈여겨봤던 장면은 아나스타샤의 ‘눈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레이를 만나 어쩔 줄 몰라하는, 수줍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이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첫눈에 반한 감정이 배어있는 그런 묘한 눈빛. 오래전에 저를 사로잡았던 그 눈빛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눈빛은 그녀의 삶만큼이나 순수해 보였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어떤 표현도 부질없어지는 그 무언가가 그녀의 눈빛에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건 어느 순간부터 그런 눈빛을 보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 눈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습니다. 세파에 찌들어 욕망에 눈이 먼 사람과 세상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보려는, 자기만의 세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눈빛이 같을 수 없습니다.
영화로밖에 볼 수 없는 눈빛이라니, 세상이 타락한 건지 아니면 제가 무뎌진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젠 영화에서도 그런 눈빛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는 영화 자체가 희귀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로마의 휴일> 같은 영화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건, 영화 사조와 흐름이 변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그런 주제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엘리 굴딩의 이 곡은 ㅡ 8년 전에 나온 곡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ㅡ 언제 들어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