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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28. 2023

지금 오는 비에 정이 들었으면

오전부터 시작된 비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연휴 첫날인데 비가 오다니 실망한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들 중에 한 명이다. 하고많은 날 중에 굳이 꼭 주말에 그것도 연휴에 올 게 뭐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아무래도 비가 오면 야외활동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하물며 1년 중에 지극히 짧은 봄의 끝날에는 두말할 것도 없다.


오후 늦게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빗속을 뚫고 도착한 카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은 자꾸 창밖을 향하고. 거기에 뭐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은 데도 나는 비 오는 풍경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한동안 별생각 없이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었다. 카페 안에서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보니 비가 오는 게 마치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비 오는 거리에 내가 있었는데, 이제는 빗속을 걷는 사람들마저 낯설었다. 비 오는 거리를 걸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감상이었다.




주문한 커피를 서둘러 마신 후 다시 밖으로 나섰다. 우산을 쓰고 비 오는 거리를 걸으니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선명하다. 카페 안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비에 바지가 젖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해서 걷다 보니 평소보다 집에 가는 거리가 더 길게 느껴졌다.


비는 어느새 현실적인 상황이 되어 나의 행동, 생각 하나하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였다. 비를 맞으며 걸으니 그냥 카페에서 책을 읽을 걸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이렇게 해도 후회, 저렇게 해도 후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마저도 후회스럽기만 하고.


빗속을 걷다 보면 비가 마치 나한테만 내리는 것 같다. 아무리 피해도 나만 따라오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잘도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린다. 나만 맞는 것처럼 느낄 뿐이다. 걱정, 근심도 마찬가지다. 나만 힘들고 괴로운 게 아니다.


빗속을 걷는 것처럼, 내 일이 되지 않는 한 고통 역시 그저 나와 무관한 다른 사람의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남들보다 먼저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 타인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가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비가 오면 맑은 날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의 모습이 비슷해진다. 풍경이 정돈된다고 할까. 거리가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무엇보다 빗소리에 묻혀 세상이 조용해진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지기 좋은 날이다. 물론 지나치면 우울해지지만.


그리고 더러운 것들이 모두 씻겨 내려간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불순물이 정리되는 것이다. 우리 삶에 낀 거품과 교만을 제거하고 순결한 삶을 사려면 우리는 종종 비를 맞아야 한다. 내면의 불순물을 이참에 씻어 버리는 것이다.


그나저나 비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다. 아직 5월인데, 장마가 시작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비도 삶의 한 부분이니, 우리 인생처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발상의 전환. 하여, 나는 신현림 시인의 시처럼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를 그대와 정들기를 바라며, 지금 오는 이 '비'와도 정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군요


비가 오니 마음까지 젖어

따뜻이 불을 때야겠습니다

인간은 나약해서

이런 날 불이라도 때지 않고

커피라도 마시지 않으면

마음은 더욱 쓸쓸해집니다


바람이 일어

고인 물이 찰랑찰랑 흔들댑니다

지금 오는 비에 정이 들 듯이

그대와도 정들면 좋겠어요



<신현림 ㅡ 비 오는 날의 커피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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