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기게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모처럼 태양이 모습을 드러낸 오후. 사무실 창으로 비친 석양은 낙조(落照)가 뚜렷했다. 언젠가 어제처럼 하루 해가 질 무렵이었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심재휘 시인의 시집 <용서를 배울 시간>에 수록된 <추억에 기댄 저녁>을 읽고 있었다. 마침 지하철이 어두운 지하 터널을 빠져나와 한강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시인도 지하철을 타고 해질녁 한강을 건너며 이 시를 구상했던 것 같다.
지하철이 지하를 막 빠져나와
한강 다리를 건너려 할 때
추억에 기댄 저녁 하나가 있고
해는 하류 쪽으로 진다
물 위에서 덜컹덜컹 흔들리는 몸
그리하여 나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추억염을 앓았다고나 할까
그때는 그저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 시가 다시 생각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전철 안에서 읽었던 이 시를 우연히 기억한 것처럼, 우연히 누구를 만났고, 우연히 그때 생각이 떠오르고, 우연히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그 '우연히' 때문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추억은, 떠올랐다가 지는 해를 닮았다. 그곳에 지금도 잘 있느냐고 차마 묻지도 못한 채, 서둘러 지는 해처럼, 그 시절과 함께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라고 애써 자위해 보지만 어설픈 위로만큼이나 덧없는 일이었다.
추억은 '물 위를 달리다가 곧 가라앉을 저녁의 파문 같은 것, 사라진 빛들은 지금 그곳에 있느냐고 차마 묻지 못하는 눈빛 같은 것'이었다. 바쁜 일상에 숨고 말 테니, 또 언젠가 어제처럼 우연히 떠오르기만을 나는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