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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03. 2023

이제는 순수한 묵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니

김연수 ㅡ 이토록 오래된 미래

얼마 전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이토록 오래된 미래>에 수록된 작품 중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인상 깊게 읽었다.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하는 소설이었다. 문장을 읽었다기보다 마음에 넣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마음에 닿는 문장은, 기억에 새기기 위해,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으니까.  


계절이 바뀌는 시기, 이 문장이라도 기억하지 않으면 더 공허해질 것만 같았다. 언젠가 지금 이때를 기억하며 뭔가 추억하고 싶을 때 이 문장을 꺼내보고 싶었다. ‘그때 이 글을 읽었지. 아마 내 심정이 이랬었나?’


꼭 추억이 눈에 보이는 장소나 사람일 필요는 없다. 좋은 장소와 맛있는 음식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여의치 않으면 이렇게라도 추억을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책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문장이다.   



한때는 간절한 마음이 전부였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건만  


이제는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거울처럼,

서로의, 서로에 대한 기억들만이  


원망의 목소리도, 흐느낌도, 한숨 소리도,

웃음소리도 없이 순수한 묵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니.   



모든 것이 지나갔다. 아마 지금 이 순간도 지나가고 있으리라. 지나가는 것, 그게 인생인지도. 우리 모두 태어나서 살다가 언젠가 모두 죽는다.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사라지고, 곧 잊힌다.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잊혔듯이.


한 번 잊힌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묵음, 침묵만이 남을 뿐이다. 침묵이라고 표현했지만 어떤 소리도 없다는 점에서 침묵보다는 無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원망도, 아픔도, 안타까움도 즐거웠던 순간도 언젠가 묵음 처리되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허무해졌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전도서 1:2)'는 솔로몬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그렇다. 기억조차도 흐려져서 긴가민가할 때가 있으니,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아마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말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덥다 덥다 하면서도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기운 앞에서 여름을 보내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뭔가를 보낸다는 것이 익숙해질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떠나보내는 것이 낯설게 다가온다.


덥고 힘들었던 이 여름도 지나고 나면 묵음으로 남으리라. 다시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아무리 눈을 씻고 돌아봐도, 귀를 기울여봐도 허공을 가르는 숨소리뿐. 내년에 다시 여름이 오겠지만 그때 여름은 이 여름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여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여름 앞에서 다시 힘겨워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 겪고 있는 여름이 가장 더웠다고. 어서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고. 마치 낯선 것을 새로이 경험하는 것처럼. 하긴, 그 생소함이 없다면 어떻게 견디겠는가. 망각은 때로 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잊지 말아야 할걸 잊어서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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