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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Oct 08. 2023

내 머릿속에 담긴 기억은 이미 닳고 떨어져 나갔지만

"나는 애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 생각을 한다. 하나의 훈련이다. 내 머릿속에 담긴 그녀의 영상은 이미 가장자리가 닳고, 염료 조각, 금박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캔버스 전체가 텅 빌까? 내가 그녀를 얼마나 모르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주 천박하게, 아주 서툴게 알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탓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게을렀던가?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너무 나 자신에게만 열중했던가? 그래, 다 맞다. 하지만 그것을, 이런 잊음을, 이런 몰랐음을 꼭 탓할 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안다는 면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요것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존 밴빌, 바다 200p>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였던 애나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 것은 내가 한때 했던 생각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 지쳐서 스스로를 탓했던...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뭔가 달라질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기억을 붙잡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가 찾아볼 시간이나 기회는 나에게 없다. 주인공의 말대로 내가 처음부터 그녀에게서 찾으려 한 것은 나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는 한 가지 방편이었는지도 모르니까.


요즘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앎의 한계와 실체를 찾고 싶지만 쉽지 않다. 아마도 그때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기억이 생생해질 수 없다.


지난 모든 삶이 그랬다. 흐릿하게 남은 기억들. 소중한 것은 잃고 나서야 뒤늦게 찾게 되고, 찾지만 제대로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내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장 때문이다. 아프지만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글을 읽으면서 나를 제대로 보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설픈 긍정이나 위로보다는 차라리 이런 글이 나에겐 오히려 더 큰 위로가 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프로필 등 SNS에 자기 자랑과 안 그런 척하는 위선과 온갖 허위의식이 넘쳐나는 사진과 글들을 보면서, 나 자신과 비교되는 건 둘째치고 그냥 피곤하다. 내가 여기에 쓰는 내 글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또 하나의 공해가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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