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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ug 10. 2021

어느덧 2년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고백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 1892-1927)>





평생 몸담았던 검찰을 떠난지 2년째, 이 무렵 오랜 기간 몸담았던 공직을 명예퇴직했다. 내게 공직은 삶 자체였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갔고, 그 후 검사가 되어서도 단 한 번도 그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보람도 있었지만 후회도 남는 시간이었다.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시간들이기도 했다. 어려운 사건을 수사할 때, 어떻게 하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늘 했던 고민이었다. 물론 글을 쓸 시간도 별로 없었지만, 그때는 이런 곳에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자제했다.



하물며 내 개인적인 생각이나 사생활은 공개 대상이 아니었다. 여기에 글을 쓰면서도 그 경험 때문인지 여전히 그 부분은 소극적이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딱히 드러낼 만한 드라마틱한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곳에 글을 쓰면서 어느 범위까지 나를 드러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글을 인용하든,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하든, 어떻게든 '나'라는 사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최소한 내 삶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삶이 여기 쓴 글대로 사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쓴 글대로 실천하면서 산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렇지 못하다.



류노스케의 말처럼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한편 고백하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고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면에 있는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그것도 솔직하게 쓴다는 것이 작가가 아닌 이상, 성직자가 아닌 이상 쉽지 않다. 그럼에도 쓰려고 한다. 대신 스스로를 미화하지 않으려는 전제 하에,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





2년 전쯤, 파주 출판단지 내에 있는 ‘지혜의 숲 도서관’에 다녀왔다. 심플하지만 분위기는 정돈되어 있어 책을 읽고 사색하기 좋은 곳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책을 읽는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객관화하려는 노력이다. 저자의 생각에 나를 대입해 보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한다면 그 책은 바로 내 이야기가 된다.



교훈도, 재미도 필요하지만, 스토리를 내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제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힘은 묘사된 상황과 인물들의 심리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한다. 번역가 김남주는 말한다.


"책을 읽는 우리에게 떠오르는 질문들은 문학이 왜 설교나 주장이 아닌지, 왜 단답형의 대답 이상의 것인지, 그 대답을 하는 주체가 왜 작가가 아닌 우리 자신이어야 하는지까지를 포괄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책은 읽기가 힘들다.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것이 때로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책을 읽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읽어야 한다. 어느덧 세월에 무심해진, 그래서 나만의 세상에 갇혀 완고해진 또 다른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책은 세월에 저항하는 강력한 항산화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읽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그 시대를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읽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


"진정한 기품이란, 새까맣고 묵직한 큰 바위에 핀 하얀 국화 한 송이다. 흙바닥에 더럽고 큰 바위가 없으면 안 된다. 그것이 진정한 품위라는 것이다."



한 줄의 문장으로, 막연하게 여겨졌던 품위에 대해 깨달았다. 진정한 품위는 누군가를 빛내기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없어지는 것이 품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품위 있는 사람은 남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빛나는 존재로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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