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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ug 11. 2021

기다림

다자이 오사무/ 사양

지난 주말, 자주 가는 스타벅스에서 책을 보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집을 나설 때, 약간 흐렸지만 비가 온다는 예보는 듣지 못했다. 제법 빗줄기가 굵고 오래 내렸다.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낭패감보다는 비가 오니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길에서 비를 맞았다면 옷도 젖고, 귀찮았을 텐데 실내에서 보니 달랐다. 장소에 따라 상황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예전에도 경험했지만 어제는 유독 더 그랬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근처 교보문고로 향했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광화문은 한적하다. 시위대의 구호가 들리지만, 거리의 소음에 묻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서점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코로나19로 어디 갈 곳도 마땅치 않아서 그런지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새로 나온 블루투스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책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점에 오면 자극을 받는다.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이 있는 곳, 모두 책을 보고 있어 무슨 책이라도 들고 읽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약간의 긴장감도 생긴다. 그런 느낌 때문인지 몰라도 서점에 종종 들른다. 어제도 그랬다. 책을 몇 권 훑어보지 않았는데, 시간은 벌써 저녁을 넘기고 있었다.



서둘러 몇 권의 책을 사서 나오는데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입구 앞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도 서점을 약속 장소로 잡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때도 그랬었는데. 그들을 보며 문득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또 있을까.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누군가를 또는 어떤 결과를 기다리면서 보낸다.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만날 수 있을까, 결과가 좋을까, 처음에는 이런 불안감부터 든다. 상대의 계획과 상황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인내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참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더더욱. 제시간에 안 오면 지금은 전화라도 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상대의 동선을 확인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니다.



기다림을 통해 상대에 대한, 일에 대한, 상황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깊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지레짐작하지 않고 그 시간을 나와 상대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간다면 말이다. 기다림을 통해 우리는 또 한 번 성숙해진다.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는 순간까지 가보면 포장되어 있던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드러난다.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그런 모습을 확인하게 되면 스스로에게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때가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는,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기회의 순간인데, 우리는 피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결과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시간을 통해 상대에 대한 마음 씀이, 삶에 대한 내 자세가 성숙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기다린 가치는 충분하다.





영화 <You've got mail>에는 주인공 케슬린 켈리가 인터넷 대화 상대인 조 폭스가 보낸 메일을 열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 순간만큼은 뉴욕의 소음도 들리지 않아요. 거리의 소음도 안 들리죠. 오로지 내 심장이 뛰는 소리뿐..."



황지우 시인도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기다리는 이의 자세가 어떤지 잘 말하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릴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리 기다리고 싶어도 대상조차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니까. 하릴없이 TV 앞에 앉아서 가는 세월만 탓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다리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다리는 동안은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인다. 마치 나만 정지되어 있는 듯하다. 때로 지루하기도 하고, 언제 그날이 오나 날짜를 헤아려 보기도 한다. 그래도 그날은 오기 마련이다.



소설가 김경욱도 이렇게 말했다. "기다림의 마력이란 오묘해서 그냥 기다리는 것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뭔가를,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한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작당이라도 한 듯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래 기다린 사람은 생을 천천히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 또한 많이 기다렸나 보다. 그는 그의 소설 <사양>에서 기다림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다. 간절히 기다려 본 사람만이 안다. 기다리면서 겪어야 하는 애달픈 심정을.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도.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인간 생활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리지요.


<다자이 오사무 _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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