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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Oct 16. 2023

어떤 추억은 아픈 기억으로 남기도 하고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 부질없지만 때로 유용한 점도 있다. 힘든 현실을 잊는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앞으로 살 날보다 살아온 날이 긴 노년에 이른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과거가 그들이 살아왔던 인생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추억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추억이 돌연 내 안에서 다시 권력을 쥐었고 이 쿠데타는 노골적인 고통의 형태를 취했다. 이 년 전에 깨끗이 정리했다고 믿어왔던 '사소한 ' 기억이, 마치 성큼 자라서 나타난 숨겨둔 자식처럼 내 눈앞에 묘하게 거대한 것으로 되살아났다.


그것은 그 연애 기간 동안 내가 거짓으로 쌓아갔던 '달콤함'의 멜로디도 아니고, 또 나중에 내가 정리의 편법으로 사용했던 사무적인 멜로디도 아니고, 그저 추억의 구석구석까지 일종의 명료한 고통의 멜로디로 일관된 것이었다.


그것이 회한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견뎌내는 방법은 수없이 많은 앞서간 이들이 각양각색으로 제시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고통은 회한조차도 아니고, 어딘가 이상하게 명석한, 이른바 창문을 통해 거리를 구획하는 강렬한 여름 햇빛을 한없이 내려다보라는 명령을 받기라도 한 듯한 고통이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에 나오는 주인공의 독백이다. 주인공은 학창 시절 친구의 여동생 소노코와 잠깐 사귀었다. 그러나 둘은 헤어지고 소노코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이 글은 주인공이 어느 날 전차를 타고 가다가 소노코와 비슷한 여인을 보면서 과거의 그녀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자신은 소노코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자신은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라고(주인공은 동성애적 성향으로 이성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부인하지만, 그의 반성은 오히려 솟구치는 저항이 되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생각나는, 마치 자지 않으려고 하면 더 잠이 오는 것과도 같은, 그런 것이었다.




어떤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대개는 이루어지지 않거나 실패한 일들이다. 괴로운 또 다른 이유는 돌아갈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주인공이 거리에서 우연히 본 여인을 소노코로 착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은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최소한 마음에 두었던 여인임에 분명하고, 그렇다면 늘 그녀를 그리워했을 것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길에서 비슷한 여인을 만나면 예전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건, 내 의식에 그녀가 뿌리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불현듯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용수철과도 같은 것이 바로 그 추억이다. 문제는 이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사실, 현실의 벽은 두텁고 추억을 떠오르는 것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짐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어떤 기억은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옥죄는 짐과 같은 것이다.

지난밤 산책을 갈 때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이었다. 문제는 우연히 본 지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잊었던, 아니 잊으려고 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고백처럼 강렬한 여름 햇빛을 바라보라는 명령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흐릿한 현실과 비교하여 그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순간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쉬움과 회한이 섞여 있는 고통스러운 무언가가 나를 흔들었다. 돌아오는 내내, 머리에서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떤 추억은 끝내 되살아나서 두고두고 힘들게 한다. 경복궁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가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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