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수 Aug 17. 2021

아, 시마모토...

무라카미 하루키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을 읽어본 사람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 낯설지 않을 것 같다. <상실의 시대>와 달리 서사가 많지 않지만,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은 복잡하게 다가왔다.


주인공은 하지메, 그리고 그의 영원한 연인 시마모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남는 상처와 고통 그리고 그리움...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끝내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첫사랑, 모든 것이 어색하고 서툴기만 했다. 사랑하지만 그게 사랑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실패는 예정된 운명이었다. 하여, 첫사랑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남긴다. 두 사람 모두에게. 누가 먼저 떠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간이란 건 어떤 경우에는, 그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그 상처와 회복에 관한 이야기다. 좋았던 순간은 짧고, 헤어지고 견뎌야만 하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오해 그리고 원망과 후회, 어느 순간 그 감정도 윤색되어 추억으로만 남는 것, 그게 첫사랑이고 하지메가 했던 사랑이었다.


하지메도 그 후 여러 여자들을 만나면서 그녀들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아프지 않을까. 오히려 상처 받은 사람은 언젠가 상처가 아물지만, 상처를 준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메가 두 번째 연인 이즈미에게 준 상처를 끝내 잊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것처럼.






안타까웠던 부분은, 하지메가 다시 만난 시마모토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녀가 다시 사라지는 장면이다. 시마모토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메가 아닌데도 나는 계속 묻고 있었다. 아마 하지메도 그랬으리라.


시마모토는 다시 사라져야만 했을까. 그녀 또한 하지메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다가 이런저런 상처를 입었다. 하지메에게 '함께' 죽자고 한 걸 보면, 그녀 역시 사랑했던 하지메와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그녀는 하지메를 떠난다. 자신이 떠나야만 하지메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도. 하지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시마모토는 말한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일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 이만큼 와버렸으니 이제 와서 뒤로 되돌아갈 순 없잖아."






노력해서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왜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는지.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언제나 후회는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원래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픔과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하지메는 다시 만난 시마모토에게 그녀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토로한다.


"시마모토, 가장 큰 문제는 내게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거야. 나라는 인간에게는, 내 인생에는, 뭔가가 빠져 있는 거야. 상실되어 버린 거지. 그리고 그 부분은 언제나 굶주려 있고 메말라 있어. 그 부분은 아내도 메우지 못하고 애들도 메우지 못해.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너 한 사람밖에 없어."

다시 사라진 시마모토, 하지메에게 남은 것은 다시 돌아가기에는 주저되고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자신의 '현실'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 그는 깨달았지도 모른다. 살면서 잃어버린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존재는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젠 여전히 남아 있는 그의 삶과 주변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하지메는 첫사랑 시마모토를 잊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만약 하지메가 현재의 배우자 유키코를 버리고 시마모토에게 갔다고 해도 나는 하지메를 비난하지 못하겠다. 사랑은 그런 비난을 초월하는 거니까. 나나 혹시 이 글을 읽고 있을지 모를 당신이나 하지메를 다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메가 시마모토를 잊는다는 것, 잊어야 한다는 것,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소설 속 첫 장면, 하지메와 시마모토가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나오는 이 글처럼.


"고통스러울 때는 행복한 척해요.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Nat King Cole의 'Pretend'는 마치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매력적인 미소 같은 노래다. 그건 분명히 사고방식의 하나이기는 하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영화 <500Days of Summer, 2009>의 장면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Tom도 Summer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다. Tom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하긴, 헤어지는 데 이유를 알아서 무엇하겠느냐마는.


그때는 Tom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봐서 그런지 그런 Summer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메 역시 연락 없이 사라진 시마모토에게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잭 케루악 그리고 스미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