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수 Jan 07. 2024

시선의 차이 ㅡ 이해와 공감의 사이에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두 눈으로 본다. 눈이 두 개인 것은 생물학적으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눈이 존재하는 건 한 눈이 아닌 두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이다. 즉, 균형 잡힌 시선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한 눈으로만 보면 세상의 단면만 보게 될 테고 정확한 실상이나 이에 근거한 바른 의견이나 생각을 할 수 없다. 비뚤어지게 볼 수도 있고, 한 면만 보고 마치 전부를 본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당연히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이 왜곡되어 수용될 수밖에 없다. 편견이나 고집이 생기는 이유이다.


얼마 전 지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우연히 봤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무리 선행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웃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선행은 아름답지만 일시적인 선행만으로, 시스템이나 구조적인 문제가 바뀌지 않는 한, 사회는 바뀌지 않고 점점 퇴보한다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약간 생각이 달랐다.




누군가의 선행에 대해 자신의 일부, ㅡ 재산이 되었든 시간이 되었든, ㅡ 를 포기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애쓰는 그의 마음과 노력을 봐야지, 그 이면에 있는 사회적인 갈등과 약자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치우치면 그의 선한 행동조차 왜곡될 수 있다.


그에게 우리 사회가 먹고 살 만해졌는데도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왜 여전히 많은지, 어려운 사람들이 없으려면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묻는다면 지나친 일이다. 그건 정부나 사회단체, 정책 입안자들에게 해야 할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인간이 만든 제도나 시스템이 빈자나 약자를 없앨 정도로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나는 좌도 우도 아니지만 좌파와 우파가 생긴 것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선과 생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균형 잡힌 시선을 찾아가자는 뜻에서 말이다. 문제는 한쪽 편에서 다른 편을 질시하고 청산의 대상으로 삼을 때이다. 마치 내 눈에는 너희들은 없어져야 할 존재들인데 왜 이곳에 있느냐고 묻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반복하는 건 아마도 그 이유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편리를 위한 일이 불편으로 다가오는 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