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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31. 2024

최소한의 최선의 삶

<문진영 ㅡ 내 할머니의 모든 것>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을 읽다가 삶의 방식과 관련된 근사한 단편을 발견했다. 문진영 작가의 <내 할머니의 모든 것> 소설에서 특히 '최소한의 최선'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오래된 물건을 좋아한다. 쉽게 가질 수도 없고, 쉽게 버릴 수도 없는 것을. 다만 소재가 좋아야 하는데, 그래야 낡아도 그 낡음이 초라함이 아니라 나름의 멋과 향취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손녀의 시선에서 할머니의 현재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왜 이혼을 했고 왜 혼자 살고 있는지, 살면서 어떤 일이 있었고 지금의 삶은 어떻게 마련된 것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할머니의 고고한 때로는 청아한 지금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오래전에 헤어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가족 간의 메마른 감정이 아닌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모습으로.  




소설에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할머니의 굴곡진 삶이 아닌 그녀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이다. 단조롭고 단아한 미니멀한 삶. 심플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소설에서 할머니를 묘사한 이 부분이 힌트가 될지 모르겠다.


"그녀(할머니와 함께 일했던 여직원)는 배정심 여사를 똑똑하고 우아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맡은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했고, 태도에 늘 여유가 있었다. 고독해 보였으나, 그 고독함이란 오랫동안 혼자 산 사람이 흔히 풍기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고, 범접하기 힘든 느낌을 주는 그녀 특유의 분위기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졌다. 직장 내에서도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없었고, 말수가 적었으며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고독해 보였으나 고독하지 않은. 똑똑하나 똑똑함이 드러나지 않는. 많은 일을 해내나 여유를 잃지 않는. 외롭고 쓸쓸하지만 내적으로 충만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삶에서 더 충실한. 단아하고 고고(孤高)한 삶이란 이런 것이다.


"그녀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조금 더 가까워진 후에도 본인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다. 다만 후에 알게 된 것은, 그날 할머니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들을 몸에 걸치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선의 것들이자 유일한 것들을. 단 한 벌의 코트, 한 개의 모자, 한 장의 목도리, 한 켤레의 장갑. 나는 뒤늦게야 그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최소한의 최선. 그것이었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도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남편과 특별히 문제가 없었는데도 자식들을 버리고 가출한 그녀의 행동은 결국 그녀의 현재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과거보다는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할머니가 실천하고 있는 현재의 삶 자체였다.


"나는 그때 할머니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궁금해하기보다는,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에 이르렀는지, 그것이 궁금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우아하게 나이들 수 있었는지, 이 험한 세상에서. 그녀의 '혼삶'이 그녀에게 충분했는지, 외롭지는 않았는지, 어땠는지."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맞춘 포커스에서 벗어나면 아무리 재미있어도 재미를 못 느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모순 투성이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포커스를 잘못 맞추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한도 내에서, 우리가 이해 가능한 범위에서 보여줄 뿐이다. 소설, 특히 단편소설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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