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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30. 2024

어떤 진리도 강인함도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누구나 최소한 한 가지라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만 불행하고 힘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처에 대해 가끔 생각하곤 한다. 상처 때문에 힘들고 또 다른 상처로 예전에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덧나고. 이따금 우울하고 때로 의기소침한 생활의 연속. 돌파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시간들.


얼마 전 책 정리를 하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 문장이 눈에 띄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가는 것이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529 - 530p)

사랑하는 무언가를, ㅡ 사람이 되었든 반려견이 되었든 아니면 평소 아끼던 물건이 되었든 ㅡ, 잃은 슬픔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잃었다는 것은 내 곁을 떠났다는 것,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그저 슬퍼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슬퍼하는 수밖에 없다. 슬픔도 최선을 다해 겪어내야만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설프게 회피하거나 대충 덮어놓았다가는 또 다른 슬픔에 쉽게 무너지고 만다.


하루키는 슬픔을 온전히 겪어낸 후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라고 하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배웠을까.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때 온전히 슬퍼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배우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게 나의 슬픔이고 안타까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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