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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29. 2024

지금의 내가 언젠가의 나를 바라본다면

<존 밴빌 ㅡ 바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느낌, "과거가 워낙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나 자신이 그 힘에 의해 지워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존 밴빌의 <바다>에 나오는 이 문장처럼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맬 때가 있다. 과거의 어떤 기억은 때로 나를 압도하고 때로 심하게 압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이 힘들면 힘들수록 기억 속의 과거는 늘 아름답게 채색된다.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늘 부족하고 나를 힘들게 하지만 마치 과거는 여유 있고 충만했던 어떤 추억으로 간직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물론 기억이 부리는 착각에 불과하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이었다. 그의 딸과 동반한 그의 어릴 적 살던 곳으로의 여행. 그는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로 불러낸다. 그러자 딸 클레어가 말한다.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아이 말이 옳았다.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전에는 나 자신을 단검을 입에 물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과 맞서는 해적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62쪽)




지금의 삶이 의미 있게, 어떤 특별한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점점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늘었다. 주인공처럼 나도 나의 과거를 장식한 장소나 사람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가의 고향인 아일랜드라면 가능할 것 같다. 우리나라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저곳이 개발되고 바뀌지는 않았을 테니까. 물론 과거의 장소로 간다고 한들,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 년 전 내가 졸업한 대학교를 간 적이 있다. 대학 동기들의 권유로 홈커밍데이를 한다고 따라갔던 것이다. 마침 검찰을 떠나 비교적 시간적인 여유가 있던 시기였다. 너무나 달라진 교정, 건물들 그리고 생소하고 낯선 분위기가 무척 어색하게 다가왔다. 내가 졸업한 학교가 맞나 하는 심정에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내가 다녔던 그 학교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가본 적이 없으니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바뀌는 건 당연하다고 위안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과거란 그저 내 머릿속에 관념적으로 남아 있는 어떤 형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문득 쓸쓸해졌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지난 시절을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현재나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간이 소중해졌다기보다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점점 더 커져갔다.


과거와 단절된 채 현재를 살 수 없다. 과거와 현재는 이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이 말한 과거란 현재였던 것이고,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에 불과할 뿐이다. 과거의 내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고, 앞으로의 내가 있을 수 있다. 시간이 흘렀을 뿐, 딱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인생이 그런 것인가. 아마 그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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