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오후, 말조차 아끼게 되는 순간. 마치 주변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갈 것만 같은 날이었다. 점심 식사 후 잠깐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었다. 책 속에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어느 한가로운 오후, 선원들은 잠시 일손을 놓고 쉬고 있다. 바다는 고요하고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망망대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선원들은 그 무엇도 볼 수 없어 자신에게 빠져들었다. 눈을 감고 그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내가 있는 사무실 그리고 주변 풍경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멜빌의 묘사는 매우 구체적이다.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풀어놓은 듯하다. 내가 그 상황을 체험했어도 이렇게 묘사할 수가 있을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매우 인상적인 문장이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그리고 작가가 느꼈던 뭔가를 나도 느끼려고 한다. 어제처럼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책을 읽는 기쁨은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험하진 못했지만 마치 내가 그 속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말이다.
"구름이 잔뜩 낀 후텁지근한 오후였다. 선원들은 갑판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빈둥대거나 납빛을 띤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퀴퀘그와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포경 보트에 사용할 여분의 밧줄인 '밧줄 거적'을 짜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풍경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잠잠하면서도 뭔가 은밀한 낌새를 내비치고 있었고, 대기 중에는 몽상에 빠지게 하는 주문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어 말 없는 선원들은 각각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자아 속으로 녹아들어 버린 것 같았다. (...)
배 전체와 바다 전체에 기이한 꿈결 같은 몽롱함이 가득 흘렀고, 그 흐름을 깨뜨리는 건 이따금 들려오는 막대기의 둔탁한 소리뿐이었다. 그래서 마치 이것은 '시간의 베틀'이고, 나 자신은 계속해서 기계적으로 '운명'을 짜고 있는 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비 딕, 제47장 거적 짜기, 398 - 399쪽)"
주인공 이슈메일은 동료 퀴퀘그와 날줄과 씨줄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거적을 짜고 있다. 고정된 날줄은 평온한 바다만큼이나 단조롭게 왔다 갔다 하며 불변의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날줄은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손으로 이 불변의 실 속에 자신의 '운명'을 부지런히 짜 넣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반면 퀴퀘그가 막대기를 통해 때로는 비스듬하게, 때로는 비뚤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씨줄을 때리는 장면을 보면서, 날줄과 씨줄을 쳐서 최종 형태를 결정짓는 그의 무심한 막대기가 '우연'이라고 규정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마치 내 인생을 보는 듯했다. 분명 자유의지가 주어졌지만 우연과 숙명의 한계 속에서 발버둥 치는 나 자신을 말이다.
"우연, 자유의지, 숙명 ㅡ 이것들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하나로 엮인 채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항로에서 벗어날 일 없는 숙명의 곧은 날실, 그것이 다른 실과 교차할 때 일어나는 모든 진동은 사실 그 작용을 돕고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는 여전히 주어진 실 사이로 자신의 북을 자유로이 움직여대고 있다. 그리고 우연은 그 행동반경이 숙명의 직선 내로 제한되고 옆으로의 움직임은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르지만, 이처럼 그 둘의 지시를 받을지라도 우연 또한 차례로 숙명과 자유의지를 지배하며 결과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