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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ug 13. 2024

모든 것은 잊힌다는 사실 앞에서

제가 사는 동네에는 은퇴한 정치인 몇 명이 삽니다. 주말에 집 근처 카페에 가는 길에 우연히 그들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때는 TV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던 유명 인사들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제 뇌리에서 잊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예전의 빛나던 모습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저 동네에서 오고 가며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에 불과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잊히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히다가 결국 사라지는 것입니다. 드물게는 살아 있을 때의 행적이 책이나 영상으로 남기도 하지만, 누구도 잊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점점 잊히다가 죽으면 영원히 망각 속에 묻히는 것이 우리 인간이니까요.




이 평범한 사실이 예전에는 피부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늘 제가 세상에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저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당연히 잊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잊히다니, 혹여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 섭섭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중심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공직을 떠난 후에야 잊힌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가깝게 지냈던 검사들이나 함께 근무했던 수사관, 실무관들로부터 저는 서서히 잊혀갔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제가 중요한 사건을 처리하거나 처리했던 대한민국의 검사라는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렸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지금은 이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이미 잊혔거나 잊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저 자신에게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힌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조용히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려고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저는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깊이 고민한 끝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은 잊어도 나 자신은 나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입니다. 둘째, 내가 믿는 신은 나를 여전히 주목하고 있고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 다짐과 믿음 속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 자신의 본질과 추구하는 가치를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고. 이제부터는 과거의 영광 속에 빠져 살거나 여전히 타인에게 기억되려고 애쓰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오히려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며, 나만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써야 한다고.'


결국 잊힌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고 우리 앞에 주어진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만이 남은 삶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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