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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05. 2024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할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1989>를 본 건 대학에 갓 들어갔을 때였다. 처음 영화를 본 느낌은 그냥 재미있고 참신하다는 정도였다. 그때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던 시기였으니까. 무엇보다 영화 줄거리를 쫓아가느라 그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영화를 다시 봤을 때 그때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남녀의 심리 차이, 생각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자세 등등. '남녀 간에 친구가 가능할까'라는 다소 진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영화. 그렇게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로 남았다.


이 영화에 대해 다시 말하는 건, 복잡한 내 심정과 무관하지 않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내 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 이라고 썼더니,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라고. 하긴 사랑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남자와 여자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지점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문제는 그게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는 거다. 좋을 때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다름은 오히려 서로를 해치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해 끝나는 연인도 부지기수다.


서로를 좋아해서 시작된 사이가 나중에는 좋아했던 점까지도 증오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사랑이 지닌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인간의 한계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하여, 인간에게 있어 사랑은 끊임없이 추구하고 완성해 가야 할 가치이지 실현된 현실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해리와 샐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그들이 끝까지 잘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마 잘 살았을 거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다시 만났으니 그 상처를 서로 잘 보듬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공유할 일이 있거나 기억할 추억이 있으면, 그 추억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낼 수 있다. 그들처럼 어려운 시기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확인되는 관계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전에 실패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오래갔을 거라고 믿는 근거는 마지막 장면에서 해리가 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잘 알 수 있다.


"밖이 71도인데도 춥다는 당신을, 샌드위치 주문에도 1시간이 걸리는 당신을, 헤어진 후 내 옷에 배어있는 향수의 주인공인 당신을, 무엇보다 내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기에 사랑해."

둘은 서로의 한계를 깊이 공감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니 위기의 순간에도 이 마음으로 잘 버텨냈을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점, 나쁜 점 모두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 사람 존재 자체에 시선을 돌려야지 그 사람의 일부에 불과한 조건만을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알랭 드 보통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 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샐리 역의 멕 라이언의 매력은 영화를 돋보이게 한다. 물론 영화 캐릭터의 매력이다. 귀엽고 예쁜 외모를 떠나 해리를 대하는 자세와 눈빛에서 그녀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선한 감수성을 지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그녀에게 눈여겨본 것은 늘 그녀의 '눈빛'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눈빛'이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후에 본 그녀의 다른 영화들 역시 비슷했다. 그런 점에서 멕 라이언이 아니었으면 이 영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영화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물론 상대역인 해리 역의 빌리 크리스털의 연기 또한 일품이지만.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결국 해피 엔딩으로 귀결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영화와 다른 상황에 씁쓸해진다.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후회,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그래서 이 영화가 내겐 애틋하다. 어쩌면 현실과 다른 결말이었기 때문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들은 시간이라는, 편견이라는, 상처라는 삶이 주는 장애물을 통과했다. 끝까지 견딘 그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좌충우돌하면서 겪어갔던 과정 자체가 바로 사랑이었고, 그런 것이 쌓여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깊어졌으니까.   


말 한마디에, 때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쉽게 무너질 감정이었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서로 등을 돌린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극복한 건, 역시 사랑의 힘이었다.


'나에게도 누군가를 사랑할 힘이 여전히 남아 있는가? 그 사람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얼마 전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든 생각이었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재즈 피아니스트 해리 코닉 주니어의 음악 역시 영화만큼 감미롭다. 지금 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사랑은 언제나 새롭다. 진부한 건 우리 인간뿐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황홀한 고백 _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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