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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수 Mar 23. 2023

뿌연 봄날, 딱따구리와 애벌레

詩?

어쩌다 지구별리포트를 전하는 한돌(맹이)입니다   

  

어제는 저녁 무렵에 우면산 산책에 나섰습니다

내가 한눈 파는 사이에 하얗게, 붉게, 노랗게 무언가 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계절은 색깔로 오지만, 유독 봄 색깔이 진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다가 지난 겨울 동안 나는 몇 년 전 비싼 돈 들여 사놓은 콜롬비아 티타늄 오리털 파카를 한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에는 양말 한 조각도 손수건 한 장도 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슬그머니 뒷걸음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뿌연 미세먼지 속에서 계절은 점점 속도를 더해 달려듭니다

얼마 전까지 세월 오는 속도 60킬로에 익숙했는데, 이제는 거진 70킬로로 가속해서 달려드는 날짜에 조금씩 현기증이 듭니다

참 65세 이상 나이든 사람은 자동차 운전을 제한한다던가 어쩌고 하던데 어찌 되었나요? 앞으로 자동차도 굴리지 못하면 어쩌지! 그냥 걸어다녀라! 아니면 집에 있어라! (현대판 고려장?)       


등산로에서 ‘따악 딱 따아-ㄱ 딱’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다 딱따구리를 찾았습니다

저녁밥인지 낼 아침밥인지 부지런히 나무를 아대는 녀석을 한참 지켜보았습니다

내가 사진 동영상을 찍는데도 모르는 척 무심한 녀석을 보며, 나무속 벌레를 생각했습니다

며칠 지나면 어른(성충)이 되는, 모진 겨울을 이겨낸 아기(애벌레)를 생각했습니다

딱따구리가 밖에서 나무껍질을 아대며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무속에서 도망갈 곳도 없지만 큰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게 무언지 몰라도 며칠 지나면 날개 달고 하늘 날아다니겠다는 꿈을 접어야 할 게 분명합니다

프랑스혁명의 와중에 감옥에서 길로틴을 기다리던 프랑스 왕 루이 16세가 생각났습니다

화려한 날은 뜬구름이 되었고, 곧 끝나는---  

그런데 애벌레야말로 그동안 나무껍질 속에 갇혀 고된 세월,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냈는데     


내가 딱따구리일까? 애벌레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마 이도저도 무심한 무언가 자연(自然)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봄은 불쑥 와버렸고, 곧 여름이 되고 세월은 속절없이 또 가버리고 올 겁니다

봄이라며 산에는 회색 배경 아래 생강꽃, 진달래, 개나리가 벌 나비도 없는 풍경을  흔들고 있습니다

산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개 마스크를 쓰고 있어 나도 검은 마스크를 꺼냈습니다     


어쩌자고 모진 봄날에 비는 오지 않고, 뿌연 먼지만 날리는지---


지금까지 인류세 6번째 생물 대멸종의 현장에서 지구별리포트 한돌(맹이)였습니다



(우면산 딱다구리)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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