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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수 May 05. 2023

일본 총리에게 :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다

10년 만에 일본 총리가 우리나라를 정식 방문한다니 환영한다. 먼저 尹 대통령이 일본에 갔고(오므라이스를 먹었대나?), 미국 가기 전에 WP와 인터뷰하며 ‘일본은 100년 전 일로 무릎 꿇을 일 없다’고 말해서 고마워서(?) 오는 거라나. 어쨌든.     


기본적으로 이웃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중국과 일본과 사이좋게, 북한은 우리의 동족이기도 하니 더욱 사이좋게.     


이번 방한길에 무얼 논의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땅 대마도 반환을 이야기해야겠다.     


지난주 민주당 전용기 의원이 청년들과 함께 독도를 방문했는데, 일본이 항의했다고 한다. 내 땅에 내가 가는 데 항의라고? 예전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4일 독도를 방문했을 때도 일본이 거세게 항의(?)했는데. 일본은 응큼하다. “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꺼”라고 주장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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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대마도의 날」 제정     


경남 창원시 의회가 2005년에 「대마도의 날」을 제정했다. 여기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인터넷에서 찾아 그대로 붙인다. (아래 글, 위키백과에서)     


대마도의 날     

대마도의 날(對馬島-日)은 일본 시마네현의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에 대응해 2005년 3월 18일에 당시 마산시 의회가 조례를 통해 제정한 기념일이다.     


최초 제정     


경상남도 마산시 의회는 일본 시마네 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한 데에 대응해 2005년 3월 18일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시의회는 이날 오후 109회 임시회를 열고 ‘대마도의 날 조례’ 안을 긴급 상정해 30명의 의원 가운데 출석의원(29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날 제정된 조례는 쓰시마 섬이 한국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며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조선 초기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의회는 당초 이날 시마네 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폐기 촉구 결의안을 논의하다 공격적으로 하자는 분위기가 강해 ‘대마도의 날’ 조례 제정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대변인 논평을 통해 “불필요한 논란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하여 자제를 부탁했다.     


개정안 제정     


2012년 12월 11일에 창원시 의회가 본회의를 통해 '대마도의 날 조례 전부개정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기존 마산시 의회에서 제정된 '대마도의 날 조례'의 이름이 '창원시 대마도의 날 조례'로 바뀌었다. 조례 목적에 객관적인 사료를 근거로 하여 대한민국 국민과 세계인의 올바른 여론을 형성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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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승만 대통령대마도 반환」 요구     


대마도 반환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바로 일본에 말했던 이야기다. 1949년 초에도 거듭했지만, 국교 정상화 이전이라 제대로 대화채널이 없었다. (대마도는 한국전쟁 이래 어정쩡하게 일본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나는 바람에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를 놓쳤고, 일본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전쟁특수로 떼돈을 벌었고, 1965년 박정희가 추진한 한일국교 정상화에도 의제로 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대마도를 통치하던 종씨(宗氏)는 원래부터 우리 쪽 사람이고, 우리 쪽에서 관직을 받았다. 매년 쌀 등 곡식도 받았다.     


부산에서 배 타고 대마도에 가본 적이 있다. 배로 1시간 여면 도착하니 금방이다. 대마도는 일본 쪽에서는 매우 먼 섬이고, 우리 쪽에서는 부산이나 남해안에서 바로 보인다.

(잠깐,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있다. 일본 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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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일본의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을 아는가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먹기로 한 일이 있는데, 100년이 넘은 일을 이제 와 어쩌겠냐마는, 지금도 다시 비슷한 짓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하려 한다.

(아래,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 그대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The Katsura-Taft Agreement)     


요약 :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으로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승인 아래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시 : 1905년 07월 29일

장소 : 도쿄

목적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적 지위 인정

가입국가 : 미국·일본     


1905년 7월 29일에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임시외무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桂太郎]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후에 미국의 제27대 대통령이 됨) 사이에 맺어진 비밀 협약이다. 가쓰라-태프트 협정, 가쓰라-태프트 각서(Taft Katsura Memorandum)라고도 한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7월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는 필리핀을 방문하던 도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가쓰라 총리와 기밀 회의를 열어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주요 의제를 논의하였고, 7월 29일에 회의의 주요 내용을 담은 합의 각서를 작성했다. 태프트는 이 합의 각서의 내용을 곧바로 당시 국무장관이던 엘리후 루트(Elihu Root)에게 전보로 알렸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7월 31일 그 내용을 승인하였다.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던 태프트는 8월 7일 가쓰라 총리에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 사실을 알렸다. 가쓰라 총리는 다음날 러시아와의 강화협상 전권대표로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로 가 있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외상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로써 일본과 미국의 합의 과정이 완료되었다.     


이 밀약의 내용은 서명된 문서나 조약의 형태가 아니라 서로의 합의를 기록한 각서로만 존재하며, 그 내용도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1924년 미국의 외교사가인 타일러 데닛(Tyler Dennett)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문서들을 연구하다가 발견해 《커런트 히스토리(Current History)》 지에 발표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될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는데, 그해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해군이 큰 전과를 거두면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미 러시아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화 권고를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가쓰라와 태프트의 기밀회의에서는 러일전쟁 이후의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안건들이 논의되었고, 두 나라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항에 합의하였다.     


첫째,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침략할 의도를 갖지 않는다.

둘째, 극동의 평화 유지를 위해 미국·영국·일본은 동맹관계를 확보해야 한다.

셋째,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     


특히 가쓰라 총리는 대한제국 정부가 러일전쟁의 직접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 문제의 폭넓은 해결이 러일전쟁의 논리적인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가 단독으로 방치되면 다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어 전쟁이 발발할 수 있으므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가 임의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수 없게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태프트 특사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protectorate)으로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동의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 밀약은 일본과 미국이 한반도와 필리핀에 대한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영국·일본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에게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에게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해 러시아에게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처럼 국제 사회에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노골화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보호국의 지위로 전락시켰으며, 1910년 8월 29일에는 주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한반도의 식민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해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The Katsura-Taft Agreement]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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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지배는 지독했다     


세상에 다른 나라를 식민지배하더라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일제는 1910년 식민지배 직후부터 땅이름(지명)을 모두 바꾸고〔약 3만 6천 개 지명을 바꿨다. 이걸 창지개명(創地改名)이라 부른다〕, 거기 사는 사람들 이름도 바꾸고〔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한다〕,  현지 말조차 쓰지 못하게 강제하는 정책〔한국말(당시 조선어) 사용금지〕을 하였다. 


이런 정책을 사용한 나라가 일본 말고 어디 또 있나 모르겠다.     


현재까지 논의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노역 문제도 중요하지만, 대일항쟁기*에 일본은 철저히 이곳을 수탈하였고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 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지배 시기, 사이버외교사절단 VANK의 권고대로 종전 ‘일제강점기’를 ‘대일항쟁기’로 바꿔 쓴다     


일제가 후진상태인 우리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35년을 착취했는데 아주 없기야 했겠나? 그런데 남북을 비교하면 남쪽은 거의 발전이 없었다. 발전소나 공장을 대개 북쪽에 세우는 바람에, 남에는 제대로 된 공장이 드물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남북이 갈라지면서, 남쪽은 한동안 전기불도 제대로 켤 수 없었는데 일본이 무얼 잘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 한국전쟁 끝나고도 1970년 정도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1인당 소득이 높았다. 이걸 보더라도 일제가 식민지배를 통해 우리를 발전시켰다는 논리가 허구라는 게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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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나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구상한 것이 『동양평화론』이다.     


일본, 청나라(중국)과 조선(한국) 3국이 공동의 역사 문화를 살리고 서로 도우며 함께 살자는 이야기다. 늘 역사를 되새기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밝은 미래를 구상하자는 이야기다. 


예전에 칸트도 영구평화론을 이야기하였다. 동아시아의 평화, 세계평화를 위한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일본 기시다 총리의 방한을 환영한다. 성과 있는 좋은 시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 「매봉재산 30」은 정치·사회 현상에 대해, 어느 지공선사(地空善士,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사람, 가끔은 指空禪師)가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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