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갔을 때 느꼈다. 끝맺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늘 겪었던 일이다. 식사가 끝날 즈음이 되면 종업원들이 옆에 와서 묻는다." finish?" 그렇게 물은 후 손님이 "yes"라고 말해야 그제야 종업원들은 음식을 치운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도 중요하다. 일은 시작하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다. 그런데 글은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말은 말이 없고 입도 입이 없다. 입은 있으나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못 쓴 것이 아니라 써지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글이 안되니 그동안 써 놓은 글이라도 다시 한번 읽어 봐야지" 이런 마음으로 글을 다시 읽었다. 그런데 "어? 이 글 내가 쓴 거 맞나? 왜 이렇게 썼지?" 이런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글이 한두 개가 아니다. 죄다 그런 생각이 드는 글 천지다.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앞뒤 문맥도 맞지 않고 툭툭 삐져나오는 단어나 문장들이 정말 많다. "아, 맞아, 이래서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구나" 싶다. 매력 있는 이야기는 읽어 내려가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저절로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풍덩 빠져야 하는데 우물 밖에서 이런 우물이 있구나 이런 생각만 들게 한 것 같다. 수박 겉핥기 식 글을 쓴 것 같다. 어떻게든 글을 써서 올려보자는 무심한 태도의 글쓰기는 아니었나 반성 중이다.
한 가지가 안되면 다른 것들도 덩달아 안된다. 머피의 법칙처럼. 산문이 안되니 동시도 써지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열심히 읽고 있다. 산문과 동시집을 번갈아 가며 읽고 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왜 그들처럼 쓰지 못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 펜을 들지 못한다. "아, 이 작가는 이럴 때 이런 생각을 했구나.""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은 한 적 있는데 이렇게 글로 표현하질 못했구나"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정말 부럽다. 이걸 보고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하다니 정말 멋지다"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부러우면 진다는 말, 이럴 때 동감한다. 정말 부럽다. 그 부러움은 나를 자책하게 만든다. 그래도 가끔씩 책을 읽다 보면 문득문득 스쳐가는 이미지나 생각들이 있다. 그럴 땐 그것들을 발견해 동시를 쓰거나 산문을 쓰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고 그렇지 않은 적이 훨씬 많다. 그저 읽는다는 것에 만족한다.
똑같은 사물을 보아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관점과 시각은 다르다. 어느 날 아는 선생님이 "혹시 모과나무 꽃 보신 적 있어요?" 묻는다. "모과나무 꽃요? 본 적 없어요." 했더니 바로 눈앞에 있는 모과나무로 손을 끌고 간다. 4월, 지금이 모과나무 꽃이 필 무렵이다. 내 눈높이를 능가하는 곳에 분홍색 자그마한 모과나무 꽃이 피어 있다. 피어 있다는 표현보다 겨우 달려있다고 해야 할까? 눈여겨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정도의 크기다. 정말 눈 씻고 쳐다봐야 겨우 보인다. 생전 처음 봤다, 모과나무 꽃. 처음 본 꽃이라 그런가? 신비롭고 의아해 보인다. 고개 들고 한참을 쳐다봐도 색깔만 보이지 정확한 꽃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다시 한번 찾아서 보았다. 모과라는 열매가 있으니 꽃이 피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왜 나는 모과나무 꽃이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실감했다. 꽃이 핀 것을 눈여겨보지 않았으니 모과나무 꽃이 눈에 보일 리 만무했다.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서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 뗀다고 모르는 일이 되진 않는다. 내가 모과 꽃을 못 봤다고 떼를 써도 모과 꽃은 피고 모과도 열린다. 내가 되지도 않는 말로 글을 써놓고 내가 언제 저렇게 썼지? 외면한다고 해서 내 글이 아닌 것은 아니다.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모과나무 꽃을 발견하듯 색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내가 발견해 작품으로 쓰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다. 기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많은 글들을 쓰고 있었다. 글쓰기는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마음속에서 갈고닦아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올 채비를 갖춘다. 여기서 입은 땅이다. 땅 속에 갇혀 있던 씨앗들이 세상을 향해 싹을 틔우듯 지상 밖으로 힘차게 발돋움한다. 그렇게 세상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런 글들이 자라면서 햇살을 따스하게 받고 비도 맞고 바람도 맞으며 잘 자란다. 가끔 가지치기도 해야 한다. 한 번도 가지치기를 하지 않았으니 겹 가지가 무수히 자랐을 것이다. 겹 가지를 자르고 정돈하는 길이 남아 있다.
퇴고는 어렵다. 이미 써 놓은 글을 다시 수정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 시도 동시도 산문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작품을 한번 써놓고 나면 그걸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글을 쓸 때는 거기에 푹 빠져 있어서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것이 들어갈 틈을 내주지 않는다. 그것이 함정인데 정작 본인은 함정인 줄 모른다. 합평을 받아보는 방법도 좋다. 그러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글을 남에게 보여주긴 때로 창피하다. 합평 자리도 만만치 않다. 합평을 받아 본 적 있다. 사람마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다르다. 좋아하는 성향이 다르다. 그 성향에 맞출 필요는 없다. 다만 매끄럽지 않은 작품들은 남들도 금방 알아챈다. 읽다 보면 모래 씹는 것처럼 서걱서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을 쓸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합평을 하다 보면 눈에 띄기도 한다. 물론 상대방 배려하는 마음에서 좋게 말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대로 말해주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그 작가의 기분이 상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처절하게 본인이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동시 합평 시간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쓴다고 쓴 작품이었다. 그런데 다른 작품들 합평을 하고 내 차례가 되었다. 합평을 할 때는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합평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들, 결국은 다 맞는 말이다. 합평을 듣고 나면 그때서야''아, 맞아,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때늦은 후회가 밀려오곤 한다. 글 쓸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삐걱삐걱 흔들거린다. 흔들거리다 결국은 바닥으로 주저앉고 만다. 그런 작품들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으나 지도 샘이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이건, 버리세요. 잘 버리는 것도 공부입니다." 별것도 아닌 작품에 미련이 남기도 한다. 힘들게 쓴 작품인데 휴지통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쓸데없는 미련은 갖지 않는 게 상책이다. 끝이라는 글자를 잘 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