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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04. 2021

어린이

동시

                                            



난 어른이다. 어린이가 아니다. 어른은 크고 어린이는 작다. 난 크고 넌 작다. 몸만 크다고 어른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의 터널을 지나왔다. 어느 순간 다시 그 터널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들어가 보고 싶다. 그때 만의 느낌이 있다. 어른은 느낄 수 없는 그런 거 말이다. 어른이 어린이로 돌아가긴 어렵다. 억지를 써야 한다. 그래도 가고 싶다. 이유는 딱 하나다. 순수해지고 싶다. 난 지금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바란다. 바람이 많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을까? 가진 건 없는데 소망은 많다. 열정을 많다.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길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았다. 터널 입구를 찾았다. 순수로 가는 길을 찾은 것이다. 그 길로 들어선다. 시가 어른의 것이라면 동시는 어린이의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그래서 동시를 쓴다. 배우기로 했다. 다시 순진해지고 싶다. 물든 마음을 다시 하얗게 표백하고 싶다. 도화지로 만들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무지의 상태로 돌아간다. 새로운 시작이다. 도전이다. 발칙한 발걸음을 기대하며 간다. 상상으로 걷는다. 키 작은 아이로 돌아간다. 마음도 작아진다. 발도 작아지고 손도 작아진다. 모든 것을 작게 만든다. 오로지 작아지는 연습을 한다.  

동시는 어떤 맛일까? 병아리처럼 노란 맛일까, 장미처럼 빨간 맛일까, 나비처럼 하늘을 나는 맛일까,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발자국 맛일까, 호기심이 왕성해질 무렵, 나는 동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물론 시인으로 등단도 하고 시집도 냈으니 시랑은 조금 떨어져 있어도 되려나 싶을 때였다. 문창과에 다닐 때는 과목에 동화가 있었으나 동시는 없었다. 동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잘 모른다. 동시를 읽지도 않았다.

  그랬던 내가 동시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 동기가 있다. 아들이 결혼하면서 손녀가 생겼다. 꼬물거리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자꾸 눈길이 간다. 그런데 나만 보면 운다. 낯설어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 눈에 내 눈을 맞출 수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고민한다. 그러다 동시를 써볼까? 생각했다. 그러면 아이의 눈길을 받을 수 있으려나. 저 아이가 커서 책을 읽을 무렵, 내가 쓴 동시를 저 아이가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이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다. 나만의 술수다. 순수하지 못한.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 할머니 심정이다. 같이 살지 않는 손녀는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낯가림이 심하다. 우리 아들 딸 키울 때, 그 애들도 낯가림이 심했다. 시댁에 일이 있어 가면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손녀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엄마하고만 있다가 할머니 집에 오니 아이 입장에선 낯선 풍경에 낯선 할머니일 것이다. 당연하다. 그럴 때마다 저 애 마음에 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의 눈에 들까? 고민이다. 손녀의 마음을 모르겠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난감하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동시를 배우는 거나 다름없다.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순수의 눈동자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마음만이라도 그러고 싶은데 잘 안된다. 어렵다. 손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동시를 배우기로 했다. 순수해지려고 배운다. 녹슨 마음을 다시 닦아내고 순수로 돌아가려 한다. 될 진 잘 모른다. 그래도 열심히 닦아보려 한다. 될 때까지......

  시인 중에 동시를 쓰는 작가도 많다.  그런 말이 있다. 시인은 동시도 쓸 수 있지만 동시인은 시 쓰기가 어렵다는. 꼭 맞는 말이라고 단정 지을순 없다. 누구에겐 맞는 말일 것이고 누구에겐 틀린 말이다. 어른이 되어 어린이의 마음으로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나는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다. 속세에 때가 많이 묻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찌든 때를 어떻게 하면 털어낼 수 있을까 고민이 많다. 목욕탕에 가서 때를 민다고 떨어져 나갈 그런 때는 아니니 말이다. 

  동시를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동시를 읽게 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교수님들이 늘 우리에게 해주던 말이다. 모방을 우리는 필사로 배웠다. 열심히 필사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본인 작품을 쓸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화가 된다는 것이다. 시를 읽다가 동시를 읽으니 조금 심심하다. 음식을 했는데 소금이 덜 쳐진 상태라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다. 심심하다를 쉽다로 해석하면 안 된다. 여기서 심심하다는 말은 쉽다는 말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보다는 술술 잘 읽힌다. 읽는다는 것과 쓴다는 것은 실제 엄청난 차이다. 읽을 수는 있어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창작의 고통이란 말이 왜 있겠는가? 고통을 없애려면 진통제를 먹어야 한다. 진통제를 꿀꺽꿀꺽 삼켜가며 창작을 해야 한다.  

  시는 어렵고 동시는 쉽다. 이렇게 말려했으나 동시도 어렵다.  시에 비하면 동시는 고통이 덜하다는 말에는 동감한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만의 특징이 있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 , 자체가 나에겐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세월이 간다. 물론 앞으로 더 공부를 할 예정이다. 올해 신춘문예에 동시 원고를 넣었다. 도전, 이란 말을 난 좋아한다.  도전이란 말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노력하는 자에게만 날개를 달아준다. 그 날개를 달고 날아갈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내 양 어깨에 날개가 달린다면 그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생각이다. 

  동시를 쓸 때만큼은 아이의 순수한 눈망울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물을 바라볼 때도 사람을 바라볼 때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그런 시선을 갖도록 채찍질해야 한다. 그래야만 술술 풀려나오는 휴지처럼 글이 써질 것이라 믿는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던 아이가 첫걸음을 떼듯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소중한 한 걸음 한 걸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이제 아이가 걷는다. 뒤뚱뒤뚱 걷는다. 한두 마디 말을 한다. 구석을 좋아한다. 졸졸 따라다닌다. 웅크려 잔다. 기지개를  켠다. 하품을 한다. 운다. 크게 운다. 먹는다. 논다. 웃는다. 활짝 웃는다. 동시가 활짝 웃는 그날을 위해 오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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