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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03. 2021

글씨

캘리그래피

                                                                                                                                                                                                                                             

저의 작품입니다.



글에도 씨가 있을까? 있다면 무슨 색일까? 까만색? 역시 내 생각은 고루해. 씨 하면 까만색이 먼저 떠오른다. 씨도 여러 가지다. 씨앗은 많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무지개를 담고 있다. 하늘을 담고 있다. 땅에서 큰다. 바닥을 품는다. 대지를 감싼다. 온기가 생긴다. 싹을 틔운다. 기지개를 켠다. 눈을 비빈다. 손을 뻗는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다. 초록이 나온다. 줄기가 생긴다. 잎사귀가 자란다. 꽃이 핀다. 열매가 달린다. 씨앗이다. 다시  씨다. 본연의 자세다. 그런 마음으로 글씨를 배워보기로 했다. 자세를 가다듬는다. 기본이 되어야 한다. 바탕이 좋아야 한다. 으뜸이 되어야 한다. 근본을 알아야 한다. 무언가의 씨앗이 되기 위해서다. 제대로 된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예쁜 꽃을 피워야 한다. 활짝 피워야 한다. 아름답게.

난 글씨를 좀 쓴다. 내 생각만은 아니다. 인정받았다. 친구들에게. 학창 시절 이야기다. 선생님들이 칠판에 필기할 일이 생기면 나에게 시키곤 했다. 가끔 있었다. 아주 잘 쓰는 글씨는 아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내가 글씨를 잘 쓴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그때 이야길 한다. 아직도 너 글씨 잘 쓰지? 물론 아주 못 쓰는 글씨는 아니다. 애매한 위치다. 잘 쓰지도 못쓰지도 않는 그 경계, 그쯤에 서있다.

  글씨가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글씨 잘 쓴다고 특별한 것도 아니다.

글씨 못쓴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글씨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된다. 공부 잘하면서 글씨 못쓰는 친구도 있다. 공무 못하면서 글씨 잘 쓰는 친구도 있다. 이런 말도 있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글씨는 못쓴다. 물론 다 맞는 이야긴 아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 경우의 수다. 그러나 글씨를 너무 못쓰면 그 사람 얼굴을 한번 쳐다보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글씨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나 보다. 바꿔야 할 텐데...... 난 편견이 있다. 공부 잘하면 글씨도 잘 써야 한다는 식이다. 공부와 글씨가 무슨 상관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상관없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생각은 생각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글씨를 배우러 다녔다. 캘리그래피다. 캘리는 서예에서 파생됐다고 한다. 난 서예를 모른다. 붓을 모른다. 먹도 모른다. 처음부터 배운다. 하나부터 배운다. 이제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신입생이다. 콧 수건을 단 학생이다. 배운다는 것은 좋다. 기분이 새롭다. 낯설다. 신경이 곤두선다. 꼭 초등학교 때 옆 짝꿍이 누굴까? 고민하는 학생 같다. 신선하다. 충격적이다. 처음 붓을 잡으면서부터다. 난 내가 이렇게 글씨를 못 쓰는지 몰랐다.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동안의 글씨는 글씨가 아니다. 글의 글자도 안 배웠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뭔가를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다. 캘리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 잘난 척하던 나는 이제 없다. 글씨 배우는 일은 어렵다. 평탄하지 않다. 자랑질한 게 무슨 소용인가?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걸 자랑한 것이다. 척한 것이다. 그런 척, 한 것이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붓은 붓대로 글씨는 글씨대로 따로 놀았다. 어린 시절에 서예를 배울 걸 싶다. 때 늦은 후회다. 연필이나 볼펜으로 쓰는 글씨와는 다르다. 옛날처럼 먹을 갈아 쓰진 않는다. 세월이 좋아져서 먹물을 사서 쓴다. 그 시간은 절약된다. 쉽진 않다. 마음이 삐뚜른지 붓도 삐뚤어진다. 당연히 글씨도 엉망이다. 자세도 엉망이다. 한 글자 쓰기가 이렇게 어려운 지 몰랐다. 규칙에 정해진 대로 쓴다는 게 어렵다. 무엇이든 나름의 법이 있다. 캘리는 캘리 규칙이 있다. 하나를 크게 쓰면 하나를 작게 쓴다. 또 글씨와 글씨를 걸쳐서 쓴다. 머 등등 이런 규칙이 정해져 있다. 글씨를 잘 쓴다고 자부하던 나였기에 캘리도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붓을 잡는 순간부터 어렵다. 잡기도 어렵고 그 어려운 붓을 잡고 글씨를 써 나간다는 것도 어렵다. 직각으로 잡아라. 검지와 중지, 두 개로 앞을 잡아주고 약지로 붓을 받쳐라. 복잡하다. 도구를 사용하기 전, 도구의 사용법을 배우는 원시인과 똑같다. 그런 자세다. 나도 그런 자세로 배웠다.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씩, 그림 그리듯 배웠다. 배우면 배울수록 힘들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일 뿐, 붓은 붓대로 제 갈길로 간다.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난 어렵다. 그래도 열심히 썼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쉬지 않고 노력했다. 퇴근하면 바로 글씨 쓰러 갔다. 문 닫는 시간까지 쓴다. 못쓰니까 노력했다.  많은 글씨들을 썼다. 대부분 출간된 내 시집에 있는 문장이나 단어들을 꺼내 썼다. 남의 문장을 베끼는 것보다야 내 것을 좋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문장은 많다. 흔하다. 그게 그거다. 내 것이 좋은 거이여. 내 나름대로 해석했다. 자연스레 그림도 배우게 된다. 글씨와 그림은 불가분의 관계다. 글씨만 있기엔 허전한 공간, 그런 곳에 그림을 살짝살짝 그려 넣는다. 그림은 글씨의 양념 같다. 없으면 심심하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양념을 하면 짜지는 게 음식인 것처럼 과하면 멋이 반감되기도 한다.

  한지에 글씨는 쓰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붓을 대면 스르륵 번지는 예스러움에 반하곤 한다. 발레리나들의 곤두선 발끝 같다. 팔과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무대에서 그려지는 곡선 같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멋진 공연 같다. 그렇게 붓이 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언젠간 무대에 설지도 모른다. 붓에 먹을 묻혀 한 글자씩 하얀 공간을 채우는 일이야 말로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공간은 무언가로 채워질 때 그 소임을 다한다. 물론 여백의 미도 있다. 여백은 쉬어가는 벤치 같다. 그 여백에 앉아서 잠시 하늘 한번 쳐다보고 땅 한번 쳐다본다. 그렇게 여백을 찾고 여백을 메꾸곤 한다. 글씨를 쓰고 그림을 채워 넣고 또 그 자리에 빈 공간을 마련하고 그런 과정을 끊임없이 연습한다.  

   붓을 들 때마다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붓을 대하는 나의 생각도 달라진다. 붓은 붓대로 붓만의 고집이 있다. 그런 고집 속에서 멋진 글씨가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집을 생각하니 선비가 떠오른다. 붓과 선비, 어울리는 한창이다. 한지에 그려진 글씨들은 날아갈 듯 날아가지 않는 고깔 같다.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의 승무가 생각나는 날이다.

  한지에 글씨 쓰는 것이 웬만큼 된다 싶을 때부터 조그만 작품들을 만든다. 맨 처음 한 것은 컵 받침이다. 거기엔 딱 두 글자만 썼다. 뭉클, 수레, 이렇게 썼다. 뭉클이란 글자와 수레란 글자를 좋아한다. 뭉클을 쓰면 나도 모르게 뭉클해진다. 뭉클한 일이 없어도 뭉클해지는 건 뭉클 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느낌 때문이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안다. 눈으로만 음미해도 뭉클해진다.

시간이 갈수록 작품이 많아졌다. 부채를 비롯해서 족자, 커피잔, 양초, 액자, 시계, 도장, 도마 등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은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명품은 아니지만 주는 사람의 성의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값으로 메길 없는 소중한 것이다. 직장에선 수시로 강의를 듣는다. 일 년에 몇 번씩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강의가 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말을 한 강사가 있다. 배워서 남주자, 가 자기의 목표라는 것이다. 배운 것을 베풀 수 있다는 게 좋은 일이다. 실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선물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다. 그거면 족하다.  

 붓으로 그린 산수화가 떠오른다. 까만색 하나면 족하다. 진하게 흐리게 자유롭다. 많은 색이 필요 없다. 충분하다. 그래도 자연이 살아있다. 산등성이가 숨 쉰다. 나무가 살아 있다. 태양이 뜬다. 아침이 시작된다. 여백의 미가 있다. 흑백의 조화가 멋지다. 붓을 잡으면 왠지 나도 그런 멋진 산수화 한 점 그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들떠서 다녔다. 글씨도 그림의 한 종류다. 동굴 벽화에서 보듯 글씨 전에 그림이 있었다. 그림이 글씨고 의미다. 원조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을 위해 한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열심히 썼다. 막상 자격증을 따고 나니 시들해졌다. 더 해야 하는데 먹고사는 일에 손을 들고 말았다. 그걸로 먹고살 순 없으니 할 수 없었다. 이미 그 분야엔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이미 그쪽도 포화상태다. 내가 낄 자린 없어 보인다. 껴보라고 캘리 선생님이 말한 적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남을 주기 위한 선물을 만들었으니 그걸로 만족하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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