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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05. 2021

집콕에 대한 단상

                                                          

  밖을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행동이 제한된다. 행동의 자유가 없어진다. 반대로 생각의 자유가 생기기도 한다. 항상 변수는 있다. 집콕을 하면서 생각나는 것들을 편하게 적어본다. 누가 뭐라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자유롭고 편한 그런 날개들이다.

못이다. 나사다. 액자다. 티브이다. 침대다. 딤채다. 달력이다. 자석이다. 냉장고다. 박혀있다. 사각이다. 원형이다. 꽃이다. 꽃병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못한다. 자유가 없다. 부자연스럽다. 불편하다. 거실에도, 안방에도, 아이들 방까지 모두 그렇다. 꼼짝 못 하게 하는 단어다. 언어와 숨바꼭질한다. 옴짝달싹 못한다. 어떤 힘이 그를 꽉 움켜쥐고 있다. 놔주질 않는다. 어떤 때는 액자를, 어떤 때는 모자를, 어떤 때는 옷을 꼼짝 못 하게 한다. 마음마저 걸어 잠근다.

  안과 밖 중 당연히 안이다. 밖을 동경한다. 바깥을 동경하는 것은 삶의 이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안은 안전 하다. 밖은 불안하다. 안에 있어 행복하다. 밖에 있으면 불안할까? 언제까지 안에서 안주하고 있을까. 그것이 문제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순 없다. 자유를 찾아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생각으로만 그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실천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양말을 신는다. 옷을 입는다. 신발을 신는다. 살짝 현관을 엿본다. 밖으로 고개를 디밀어 본다. 아무도 없다. 무섭다. 두렵다. 다시 현관문을 닫는다. 내밀었던 고개를 다시 불러들인다. 이제 안이다. 안전한다. 여전히 밖은 불안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안에서 버틸 수 있을까. 그걸 모른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간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갈 수도 있다. 촉수는 항상 밖을 향해 뻗어 있다. 안테나는 세상을 향해 있다. 채널만 돌리면 된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채널, 지금 그 방송을 청취 중이다. 언젠가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산다. 앞으로 나갈 길이 정해져 있다. 그 길로 가면 된다. 정해진 그 길로 주욱......

  먼저 양말을 사야겠다. 인터넷을 검색한다. 예쁘고 멋진 양말을 사야지. 어떤 모양의 양말을 살까? 토끼가 좋을까, 아니면 달이 좋을까, 그것도 아니면 나무가 좋을까, 꽃도 예쁠 것 같은데 꽃으로 한다면 무슨 꽃이 좋을까. 양말 하나 사는데도 복잡하다. 아무거나 살까. 아냐 그러면 안돼. 기왕이면 예쁜 걸로 사자.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정리가 안된다. 생각이 헝클어진다. 참 기가 막히다. 간단한 게 없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 복잡한 건 질색이다. 안에서만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다.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 복잡하다. 내가 단순하게 살고 싶다고 단순하게 살아지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싶다. 단순해지고 싶다. 소원이다. 희망이다. 한 마디로 콕, 집콕, 이렇게 간단한 단어로 살면 안 되나? 왜들 그렇게 복잡하게 살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긴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 양말 하나 고르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지 않은가. 우여곡절 끝에 난 토끼가 그려진 양말을 사기로 결정했다.

  이젠 신발을 사야지. 양말 사는데 오래 걸렸다. 신발은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좀 더 편하게 골라보자.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결심하면서 인터넷을 검색한다. 검색을 할 때마다 속이 답답하다. 검색창에 신발이라고 쓴다. 주르륵 창이 뜬다. 아니 달려 나온다. 뭐가 이리 많아? 어느 걸 골라야 할까,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쁘다. 내 눈을 의심한다. 정말 정보가 넘친다. 홍수가 밀려온다. 쓰나미다. 눈을 뗄 수가 없다. 도무지 고를 수가 없다. 어지럽다. 머리가 아프다. 골치가 아프다. 톡톡 바늘처럼 찌른다. 서너 개만 보여주면 좋겠다. 그래도 고르기 힘들다. 사람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불만족의 아이콘이다. 많아야 좋은 줄 안다. 정보든 돈이든 말이다. 무조건이다. 따지지도 않는다. 묻지도 않는다. 그게 자연스러운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처럼 단순한 사람은 간단명료한 게 좋다. 여러 가지 말고 한 두 가지가 좋다. 정말 미친다.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다. 질문 하나에 답이 하나면 좋겠다. 하긴 시험지 답도 여러 개다. 우리 땐 4지 선다형이었다. 5지선다형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몇 지 선다형인가 모른다. 주관식도 있다. 그건 여러 갈래의 답이 요구된다. 정해져 있지 않다. 안돼. 여기서 멈추자. 앞으로 나가면 정말 되돌아오기 힘들다. 여기서 그만. 스톱이다. 끽.

  나에게 꼭 맞는 신발을 고르기 어렵다. 난 내 발 크기를 모른다. 재본적 없다. 잴 일이 없었다. 큰지 작은지 모른다. 신발 생각은 첨이다.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생각조차 안 해봤다. 신발을 신어본 적 없다. 여기서 잠깐, 그런 사람이 양말은 어떻게 샀냐고 반문할 것이다. 뭐 양발은 대충 샀다. 사이즈를 보고 고른 건 아니다, 겉모양만 보고 대충 샀다. 사이즈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양말도 눈대중으로 샀으니 신발도 그렇게 살까? 생각 중이다. 어차피 나에게 꼭 맞을 거란 생각은 안 한다. 대충 사는 게 맞다. 양말을 토끼로 샀으니 신발은 거북이가 좋을까? 이런 구시대적인 발상을 한다. 역시 난 옛날 사람이야. 신세대 하고 싶은데 그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신세대 하고 싶다고 신세대가 되진 않는다. 그게 슬프다. 되고 싶다고 다 되면 그건 세상이 아니다. 구시대 사람이니 신세대를 동경하는 건 당연지사다. 시대를 역행할 순 없다. 시대에 순응한다. 바람에 돛 단 듯 물결 흐르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배는 뒤집힌다. 폭풍은 피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힘들게 노를 저어야 한다. 노동이 필요하다. 검색이 필요하다.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래야만 살아남는다. 살짝 의심이 든다. 안의 생활에 찌들어서 별 생각을 다한다. 의심이 많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 안 그런고 싶다. 의심 많은 생을 살고 싶진 않다. 누구나 그런 생을 동경하진 않는다. 나도 그렇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누구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만약 의심을 해야 한다면 그건 나다. 나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결론은 난 역시 구시대적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팩트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정해야만 한다. 인정하자. 인정해. 결국 거북이 신발을 샀다. ㅋㅋ 토끼는 거북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거북이는 토끼를 벗어나지 못한다. 찰떡궁합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억지로 떼어낼 수도 없다. 나의 머릿속에서 너의 머릿속에서 이미 그들은 한 쌍의 커플이다. 지겨운 커플인 것이다. 어찌 보면 부부다. 알콩달콩 치고받고 그렇게 산다. 한번 이기면 다음엔 진다. 늘 이기는 자는 없다. 부부가 그렇다. 삶도 그렇다. 대체로 그러하다. 거기에 살짝 마음을 얹어 본다. 다시 동화 속으로 들어간다. 그 속엔 평화가 있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스토리는 변하지 않는다. 절대 안 변한다. 그 점이 나랑 같다. 살던 곳에서 죽 산다. 이사도 모른다. 한 곳에서 산다. 변할 줄 모른다. 변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변심한다. 이걸 보면 이걸 좋아하고 저걸 보면 저걸 좋아한다. 마음은 변덕쟁이다. 그러나 동화는 그렇지 않다. 일편단심이다. 오로지 그 속에서만 산다. 책 속에서만 산다. 동화도 나랑 같다. 같은 신세다. 언제 만나 차 한잔 마시고 싶다. 신세타령이나 하면서 말이다. 난 이런데 너도 그러니? 그렇구나? 우리 같은 신세구나. 맞장구치면서 보내는 시간을 그려본다. 재미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 뿐 동화도 움직이지 못하는 단어일 뿐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은 안된다. 동화는 동화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나도 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서로 자기의 영역 안에서 존재한다. 영역 밖은 모른다. 그곳은 여러분의 세상이다. 나와 동화 뺀 나머지 세상이다. 그곳은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궁금하다. 

   밖은 위험하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 울타리 안에서만 놀아라. 밖을 동경하지 말아라. 자제해라. 제발 만나지 말아라. 말하지 말아라. 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그냥 밥만 먹어라. 무식하게 밥만 먹어라. 입은 말하라고 생긴 것이 아닌가? 새삼스레 기능을 의심해 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뉴스에서 말한다. 사람들이 말한다. 그냥 안에서 살아라. 울타리 밖은 늑대가 우글거린다. 양처럼 그 안에서만 살아라. 훌쩍 뛰어넘다간 늑대가 잡아간다. 늑대소년 이야기가 떠오른다. 거짓말하는 아이처럼 불안에 떤다. 양이든 늑대든 둘 다 불안하다. 불안에 떨며 산다. 자기 영역을 누가 침범할지 모른다. 그러니 서로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자기가 사는 그곳이 평화다. 그곳을 벗어나는 즉시 평화는 깨진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려고 양말과 신발은 산 나는 평화주의자가 아닌가? 뭐 아직 나간 건 아니니까. 생각만 한 거니까 봐주라. 아직은 평화주의자라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준비는 했지만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아직도 두렵다. 밖이 무섭다. 모르는 세상으로 나간다는 건 모험이다. 모험은 새롭다. 갈증이 난다. 어떻게 하면 갈증이 해소될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편견을 깨야 한다. 기대를 가질 일이다. 소망할 일이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안에서 살면서 계속 밖으로 나갈 일을 고민해야 한다. 

  닭이 알을 낳는다. 알은 알로 있다. 알은 병아리가 되고 싶다. 그것도 빨리 되고 싶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세상이 보고 싶다. 동그란 눈을 뜨고 세상을 보고 싶다. 아장아장 걷고 싶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진 않다. 그래도 밖으로 나가려고 알 속에서 계속 벽을 쪼아댄다.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단 말이야!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밖으로 나가는 일은 어렵다. 쉬운 일이 아니다. 벽은 두껍다. 한 번의 힘으론 안된다. 그렇게 쉽다면 벽이 아니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벽이 아니다. 닭은 알이 안쓰럽다. 불쌍한 눈길로 본다. 어찌해줄 도리는 없다. 그러다 한 번씩 알을 안아준다. 품어준다. 내 품 안의 자식이니 이거라도 해줘야지. 그것밖에 해 줄 것이 없다. 새끼를 위하는 일이다. 병아리를 위한 일이다. 

  줄탁이란 말이 있다. 안에서 쪼고 밖에서 쫀다는 말이다. 안과 밖이 힘을 합친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든 힘을 합쳐야 성공한다. 한쪽의 힘으로 성공하긴 어렵다. 병아리가 되기 위해 알은 안에서 계속 밖을 향해 쪼아대고 밖은 밖대로 열심히 쪼아댄다. 엄마 닭이 하든 세상이 하든 누군가가 열심히 쪼아 댄다. 그렇게 서로의 힘을 합칠 때 비로소 알이 깨진다. 하루아침에 되진 않는다. 수많은 날이 필요하다. 많은 날들의 태양이 필요하다. 초승달도 필요하다. 뒤란의 감나무도 필요하다. 그늘도 필요하다. 열매도 필요하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런 세월을 거쳐야만 된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에 지쳐선 안된다. 기다림의 미학이란 말도 있다. 미학까진 모르겠고 다만 기다릴 줄은 안다. 언젠가 될 것을 안다. 그래야만 병아리가 탄생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탄생의 힘은 크다. 새로운 축복이다. 환상이다. 삶의 극치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다. 생각은 그러하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산다. 언젠간 밖으로 꼭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산다. 뭉그적거리며 있다. 어쩔 수 없는 안쪽의 생을 산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 안에서 즐기자. 그래야만 나도 산다.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여러 가지로 궁리 중이다.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다. 신조가 돼 버렸다. 혹시 누가 좋은 방법 있으면 알려주라. 댓글 받는다. 오래 참아야 한다. 여행이 그립다. 빨리 그날이 오길 기대한다. 언젠가 그렇게 될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산다. 언젠가 깨지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오늘도 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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