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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Dec 30. 2020

언니

                                                          


 언니가 있다. 딱 한 명 있다. 나와는 다섯 살 차이다. 언니는 항상 나와 비교당했다. 엄마에게. 학창 시절, 내 공부는 상위권이었다. 그에 비해 언니는 못했다. 그래서 언니는 엄마 눈에 들지 못했다. 다방면에서 대우가 달랐다. 먹을 것이 생기면 엄마는 나 먼저 챙겼다. 내가 봐도 눈에 띌 정도로 차별했다. 그건 우리가 다 큰 어른이 될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결혼을 해서도 바뀌지 않았다. 명절에 식구들이 모이면 술자리가 생긴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언니는 꼭 한 마디씩 한다. 의례 행사다. 엄마는 왜 이렇게 날 싫어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늘 푸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죄인 같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언니에게 늘 미안했다. 그래서 난 언니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주곤 한다. 언니가 처음으로 아파트를 산 날, 거금을 투척해 침대를 선물했다. 그 당시 나에겐 큰돈이었다. 아깝지 않았다. 지금도 언니네 집에 가면 그 침대가 있다. 아직도 그 침대를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는 건, 나도 기쁜 일이다. 돈이 아깝지 않은 언니다. 

  언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니에게 의논했다. 그 당시 의논할 대상이 언니밖에 없었다. 아버진 거리가 멀었고 엄마도 거기서 거기였다. 오빠도 어려웠다. 자연스레 언니가 나의 카운슬러 역할을 했다. 시골이라 사는 건 뻔하다. 반경이 넓지 않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산다. 생각도 고만고만하다. 그럴 때 언니는 도시에서 살았다. 언니 핑계로 살짝살짝 도시를 넘겨다 보곤 했다. 나도 크면 도시로 나가야지. 늘 다짐했다. 시골처녀가 읍내를 구경 가듯 언니네 집을 놀러 다니곤 했다.    

  엄마가 언니를 미워하는 건 쉽게 바뀌지 않았다. 엄마 고집은 황소고집이다. 어찌 보면 황소보다 더 세다. 언니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이 장가를 가도 변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형부까지 덤으로 미워했다. 형부는 술을 좋아한다. 술을 즐겼다. 명절에 술자리가 벌어지면 형부도 푸념을 늘어놓는다. 장모님은 왜 그렇게 큰 딸을 싫어하냐고. 술주정을 했다. 그 이후부터 쌍으로 엄마 미움을 사게 되었다. 언니도 모자라 형부까지 미움을 산 것이다. 

  해마다 명절은 온다. 술자리도 이어진다. 푸념도 따라온다. 그런 날 저녁이면 난 엄마랑 잔다.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언니 좀 그만 미워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엄마는 그냥 눈만 껌뻑 껌뻑한다. 그 당시 난 엄마와 먼 거리 부천에서 살았고 언니는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엄만 혼자 사셨다. 혼자 사는 엄마를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볼 사람은 언니다. 언니 좀 그만 미워해라.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언니의 가장 큰 잘못이 엄마 머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엄마 눈에 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공부는 표면적 이유였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스무 살 시절에 언니는 가출했다. 그 당시 가출이란 거의 사망과 같았다. 선비 같은 아버지 성격에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다. 동생들이 서울에 있는 s대학에 붙었다. 동네에 플래카드도 붙였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자식들이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물론 나는 아니다. 그런 집이었는데 언니가 집을 나간 것이다. 아버지에겐 청천벽력이었다.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언니는 형부를 따라 도망을 갔다. 물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형부다. 가출 후 3일 만에 언니는 잡혀 왔다. 아버지 손에 질질 끌려 왔다. 그리곤 끝이었다. 골방에 갇혔고 긴 머리를 싹둑 잘렸다. 큰 재단 가위로 사정없이 잘린 머리를 내가 치웠다. 언니는 민머리가 됐다. 보자기를 쓴 채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때 따라갔던 형부랑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아들 낳고 장가보내고 오손도손 잘 산다. 

  언니의 생도 파란만장하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세탁소를 했다. 그걸 언니가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쓰던 재봉틀을 물려받았고 기술을 물려받았다. 언니 머리를 자른 재단 가위도 물려받았다. 그 가위로 일을 하고 그 가위로 돈을 번다. 기구한 운명의 가위다. 지금은 언니가 세탁소를 한다. 아버지가 쓰시던 상호도 물려받았다. 그 세탁소를 운영해서 자식들 키우고 장가보내고 현재도 세탁소를 한다.

   언니는 효녀다. 물론 나보다 효녀라는 뜻이다. 효녀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언니는 엄마 집 근처에 산다. 엄마는 혼자 산다. 그래서 옆에 사는 언니가 자주 엄마를 보러 간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일요일이면 밥과 반찬을 싸들고 엄마 끼니를 해결해준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멀리 산다는 핑계로 가끔 시골에 내려가 엄마 얼굴을 보거나 전화를 거는 게 전부다.

               젊어서 속 썩이던 자식이 효도한다는 말, 그 말에 동감한다. 언니에게 딱 맞는 말이다. 그렇게 속 썩이던 언니가 지금은 엄마 곁에서 수발을 들고 밥을 챙겨 먹이고 하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엄마는 지금 언니한테 이런저런 케어를 받고 있다. 그렇게 싫어하던 언니에게 말이다. 

 엄마는 치매 초기 상태다. 정신이 가끔 가출한다. 심하진 않다. 집을 찾아오지 못하는 일이 더러 있다. 불안한 날들이 계속됐다. 그럴 때마다 언니가 호출되곤 했다. 엄마는 일이 생기면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모든 걸 팽개치고 달려왔다. 동네방네 떠돌아 다디는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가스 불 끄는 일. 화장실 모시고 가는 일, 집안 청소 등 언니가 도맡아 했다. 그렇게 언니가 많은 일들을 할 때도 엄마는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안 했다. 언니가 속상해하며 나에게 전화 한 적 많다. 엉엉 울며 전화를 한 적도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언니를 다독여 주곤 했다. 내가 언니를 못살게 굴진 않았지만 엄마 대신 내가 미안했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말해 준다. 나도 못 해주는  케어를  언니가 해주고 있으니 언니에게 고맙다고  말해 주라고 당부한다. 실제로 언니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엄마를 잊어버릴 뻔했고 거리에 쓰러져 있는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엄마가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내가 그렇게 여러 번 말을 해도 그냥 시큰둥했던 엄마였다. 엄마가 주간 보호센터에 다니고부터다. 이젠 당신이 혼자 힘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했다. 의지해야 할 사람이 생긴 것이다. 이젠 엄마도 늙었다. 혼자서 밥도 해 드시고 청소도 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본인도 알게 된 것이다. 당신의 상태를 깨우치신 것이다. 센터는 일요일엔 가지 않는다. 엄마는 이제 혼자서 밥도 못 해 드실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언니가 일요일마다 엄마 끼니를 챙긴다. 당신의 끼니를 챙겨주는 것이 몇 달 되니까 그때부터 엄마 생각이 달라졌나 보다. 어느 날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밥을 그렇게 챙겨다 줘도 너도 먹어라 한마디 없으시던 분이 어느 날부터 너도 먹어라 이런 말을 하신다며 기뻐했다. 아무 말도 아닌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을까 싶지만 언니에게 그 말은 눈물 나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엄마는 달라졌다. 언니가 밥을 챙겨다 줄 때마다 너도 같이 먹어라 이런 말도 하고 잘 먹었다 라는 말도 하신단다. 엄마가 이젠 달라졌다고 언니는 말한다. 

  누군가에게 생긴 선입견을 바꾸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선입견을 끝까지 고집해서도 안된다. 우리 엄마와 언니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나에게만 너그럽던 엄마가 이제는 언니에게도 너그러워졌다. 정말 다행이다. 나보다 더 엄마에게 효도하고 있는 언니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특히 엄마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언니가 있는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하다. 고집 불통인 엄마를 바꾸어 놓은 언니가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가 좀 부끄럽다. 그런 멋진 언니가 있어서 참으로 나는 행복하다. 멋진 우리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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