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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Dec 29. 2020

어쩌다 신춘문예 예심을

                                                            


  12월은 신춘의 계절이다. 나도 십여 년 동안 신춘만 바라보며 살았던 적 있다. 겨울 하면 신춘문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문학도라면 다 그럴 것이다. 신춘문예만 응모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난 신춘에 목숨 걸고 계속 응모했었다. 세월이 지나 신춘문예 예심을 하게 됐다. 기회가 주어졌다. 자주 오지 않는 기회다. 나에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나를 믿고 일을 맡겨 준 것이다. 내가 작품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작품을 심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다. 촉수가 많아야 한다. 다양한 시각으로 봐야 한다. 부족한 나로선 어려운 일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나도 그렇다.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온몸이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일이다. 더군다나 작품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어떤 꿈을 지향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시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영화 "시"의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꿈을 꾸는 것이 바로 시다. 사과는 보는 게 아니라 깎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사과만 덩그러니 표현하는 시가 있다. 이상만 가득하다.  그런 사람은 사과를  깎을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그 사과를 보기 좋게 깎는다. 예쁜 접시에 담아내기도 한다. 사과를 깎을 때도 평범하게 깎는 사람보다는 특이하게 깎는 사람이 눈에 확 들어온다.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싶은 사람을 찾는 일이다. 그런 작가를 찾아내는 일이다. 3년째 모 신문의 예심을 보고 있다. 누군가의 속을 들여봐 본다.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해야만 한다.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작품은 예전에 내가 냈던 작품들처럼 모두 소중하고 귀하다. 한 사람의 작품은 그 사람의 발자취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의미다. 무작정은 없다. 작정하고 걷는다. 소망으로 걸어간다. 희망으로 걷는다. 신춘의 깃발을 향해 간다.

  

  예심은 20명 정도 선에서 뽑는다. 해마다 250여 명의 작품이 온다. 한 사람당 5편이다. 대략 1250편을 읽게 된다. 그런데 어떤 작가는 40편을 냈다. 30편을 낸 작가도 있고 20편을 낸 작가도 있다. 이럴 땐 정말 난감하다. 읽는데 한참 걸린다. 그래도 꼭 읽는다. 더러 원고지에 쓰는 작가도 있다. 이런 작가들은 대체로 글씨가 멋있다. 연세가 있는 작가들인 것 같다. 난 원고지에 작품을 내본 적은 없다. 원고지는 솔직히 읽어내기 불편하다. A4로 된 작품을 읽다가 원고지로 된 작품을 읽으려면 가던 길이 꼬인다. 원고지 때문에 옆으로 틀어서 작품을 봐야 한다. 샛눈으로 봐야 한다. 많이 불편하다. 불편한 길이라고 해서 그 길을 안 갈 순 없다. 혹시나 원고지에 작품을 내는 작가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제발 다음엔 그러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글씨를 잘 쓴다고 작품이 더 멋져 보이진 않는다. 오로지 어떤 글이냐에만 관심을 둔다. 어떤 작가는 그림을 첨부한다. 멋지다. 그림을 평가하진 않는다. 그림은 가끔 작품을 읽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오로지 작품만 평가한다. 그림은 본인의 블로그나 카페에서 활용하길 바란다.  

  

  심사는 혼자서 하지 않고 은사님과 함께 한다. 은사님을 만나기 전부터 나는 작품을 먼저 읽고 있어야 한다.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그리 한다. 카페에서 만나 각자 작품을 읽는다. 좋은 작품을 고른다. 작품에는 일련번호가 적혀 있다. 번호를 적는다. 번갈아 작품을 읽어본다. 뽑아 놓은 작품의 번호가 같을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있다. 다른 작품을 골랐을 경우에는 그 작품을 서로 다시 한번 읽어본다. 서로 괜찮다고 동의가 된 작품 번호를 다시 적는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한 번에 읽어낼 수 있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다. 글씨를 열심히 들여다보면 나중엔 글씨들이 춤을 추기도 한다. 하긴 시가 춤이긴 하다. 순간의 느낌을 잘 포착해서 춤으로 표현하는 거니까. 춤추는 글자들은 내 머리를 어지럽게 끌고 다닌다. 머리가 핑그르르 돈다.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나중에는 글씨가 막 날아다닌다. '달리'의 '기억의 고집'처럼 탁자의 시계는 점점 늘어져간다. 덜그럭 덜그럭 소리가 담긴다. 꽃병에 꽂힌 작은 꽃송이에 눈길을 준다. 눈은 잠시 자연이 된다. 역시 자연은 마음의 쉼표다.   

   

  시 공부를 할 때 교수님들이 강조하던 말이 있다. 사랑 따윈 버려라. 사랑 시는 쓰지 말라고 했다. 따위를 따귀로 바꿀 수 있으면 써도 된다. 한 방이 있는 사람은 가능하다. 펀치를 날릴 수 있는 신박한 소재는 가능하다. 기존의 사랑 시를 뛰어넘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 쓰라고 했다. 난 그럴만한 자신이 없다. 그래서 사랑 시는 거의 쓰지 않았다. 뛰어넘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걸 고민하는 시간에 차라리 다른 것들을 눈여겨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시를 내는 작가들이 많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쉽게 쓰지만 쉽지 않은 것이 사랑이다. 솔직히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았나. 사랑, 어렵다. 스무 살, 청춘은 칼날이다. 그 뾰족한 칼날로 무언가를 벨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자를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 날을 갈지도 않고 무딘 칼날을 들이댄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벨 수 있다고 칼날을 아주 뾰족하게 갈아 놓은 사람만 그 칼날을 남에게 내밀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 칼날에 당신이 베일 것이다. 그런 사랑에 심폐소생 따윈 절대 없다. 

  

  심사는 과연 공정할까? 혹시 불공정한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내 작품이 떨어질 수 있지? 제대로 평가한 걸까?' 이런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그래서 내가 떨어진 거라고 착각을 한 적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맘이 편했다. 그들이 내 작품을 못 알아 본거야. 감히 나를 떨어뜨리다니. 흥, 속으로 큰소리쳤다. 그랬던 나다. 그런데 막상 내가 예심을 해보니 알겠다. 최소한 내가 심사하는 신문사만큼은 공정하다. 확언한다.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다. 법원에 가면 손들고 선서하는 것처럼 선서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공정하다는 이유를 말해본다. 작품이 올 때 아예 이름이 없다. 누가 쓴 작품인지 알 길이 없다. A라는 사람이 5편을 냈다. 그러면 그 사람은 1번이다. 1-1, 1-2, 이런 식으로 1-5까지 번호가 매겨진다. B는 2번, C는 3번, 이렇게 번호가 주어진다. 작품수대로 뒤의 번호는 바뀐다. 위에서 말했듯이 40편을 낸 분은 211-40, 이런 식이다. 번호가 그 사람의 이름인 셈이다. 그러니 누가 1번인지 누가 250번인지 모른다. 예심을 하는 나에겐 번호와 작품만 온다. 그러니 누가 무슨 작품을 냈는지 모른다. 작품은 있어도 이름은 없다. 알아서도 안되지만 알아낼 길도 없다. 궁금해해서도 안 된다. 서로가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공정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공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분들은 다시 한번 재고해 주길 바란다. 제가 겪어본 바로는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연말이면 문화부 기자들은 바쁘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신춘이 있다. 남들은 마무리할 때 반대로 시작을 하는 셈이다. 신문사의 큰 행사다. 이슈다. 연례행사다. 없어서는 안 된다. 그나마 그거라도 있어야 사는 맛이 난다. 나도 그렇다.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도 그럴 것이다. 이 신문사는 마감일자 유효다. 예를 들어 마감일자 도장이 찍힌 작품들은 다 가능하다는 말이다. 늦게 도착하는 작품도 있다. 미리 도착한 작품들이 1차 퀵으로 온다. 그다음에 2차, 3차까지 온다. 올해의 경우 4차까지 왔다. 그렇게 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자는 작품을 보낸다. 누구 하나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올해 그렇게 까지 작품 보내는 걸 보고 감동받았다.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의심의 눈초리들이 한방에 없어졌다. 저렇게까지 신경을 쓰는구나. 한 작품이라도 빠질까 봐 체크를 꼼꼼하게 한다. 그리곤 퀵으로 추가 작품을 보낸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한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다. 그 정도라면 믿을만하다고 자부한다. 기자는 기자로서 최선의 노력을 한다.   

  

  올해는 12월 9일까지 예심을 마쳤다. 예심을 마치면 그 작품을 뽑은 이유를 써야 한다. 뽑은 이유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기자에게 메일을 보낸다. 그런 다음 읽고 난 작품들은 다시 신문사로 보낸다. 착불로. 그렇게 보내고 나면 내 일은 끝이 난다. 원고는 두껍다. 책이 두껍다. 작품을 보낸 작가들 생각도 두꺼울 것이다. 잘 넘겨지지 않는다. 원고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침을 묻힌다. 책을 읽을 때마다 침을 묻히는 습관이 있다.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다. 나쁜 버릇인 줄 알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침을 묻힐 때마다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금서가 하나 있다. 읽지 말라는 뜻으로 책에 독을 묻혀 놓았다. 사람들 심리는 비슷하다. 읽지 말라고 하면 더 읽고 싶어 하는 게 사람 심리다. 그 소설에서도 책을 넘길 때마다 손에 침을 묻혀 읽는 독자가 있다. 금서라 생각하면 나도 읽어보고 싶어 질 것이다. 또한 숨어서 읽는 재미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금서를 읽는 내내 궁금증을 유발할 것이다. 호기심 만발이다. 독이 묻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책에 빠질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입술이 까맣게 변한다는 것도 모른 채. 눈치가 백치다. 그만큼 책이 재미있다는 증거다. 눈치라도 있었다면 입술이 타는 걸 알았을 텐데 몰랐다는 것은 죽음도 불사할 만큼 줄거리에 흠뻑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죽음은 어쩌면 행복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남의 죽음을 미화하면 안 되지만 말이다. 만약 그런 책이 있다면 나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래서 샀다. 장미의 이름. 그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침을 묻혀가며 읽는다. 다행인 것은 입술이 까맣게 타지는 않는다는 거다. 정말 다행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 내 입술은 제대로 있나 확인을 해가며 읽었다. 독은 없다. 다행히 살아 있다. 난 이런 말이 나온다. "예전의 장미는 그 이름일 뿐, 우리에겐 그 이름들만 남아있을 뿐."이라는 구절이 있다. 독은 이름일 뿐 독이라는 말만 남아 있다.

  

  독이 묻어 있진 않지만 독을 먹는 기분으로 살벌하게 심사한다. 소중하고 귀중한 작가의 자식들이다. 한 장 한 장에 소원을 적어 하늘에 띄워 놓은 풍선 같다. 어떤 작품은 중간에 가다가 터져 버리는 것도 있고 어떤 풍선은 세계일주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풍선엔 일 년 이란 긴 세월이 담겨 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세월이 깃들어 있다. 글씨들이 살아있다. 팔딱팔딱 움직인다.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활어 같다. 언젠가 그 수족관을 뛰쳐나올 것이다. 자유를 향해. 


  기다린다는 말, 좋아한다. 기다리는 동안은 정말 행복하다. 그 마음 하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설렌다. 언제쯤 나에게 연락이 오려나? 혹시 내 작품은 잘 도착했을까? 설마 안 간 것은 아니겠지? 수정을 조금 더 해서 보낼 걸 그랬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래도 그런 기분마저도 좋다. 기대하고 고대한다.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다. 지치고 힘들지만 고맙다. 연말이 버겁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태양은 뜬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새해가 온다. 신춘이 온다. 새벽이 온다. 1월이 온다. 소식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20일이 넘어도 전화가 없는 사람은 포기해라. 이미 끝난 게임이다. 나도 다른 분야에 응모했는데 연락이 없다. 떨어졌다. 하지만 난 내년에 다시 도전할 것이다. 혹시 나처럼 연락이 없는 사람은 내년이 있다. 기대 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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