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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Dec 31. 2020

별이 빛나는 밤에

                                               

저녁이다. 집으로 간다. 가로등이 인사를 건넨다. 골목이 바스락거린다. 전봇대가 보초를 선다. 단풍나무 눈이 빨갛다. 고양이가 숨는다. 신발이 걷는다. 자동차가 존다. 골목이 눈을 뜬다. 별이 뜬다. 새벽이 꼬물거린다. 고독이 밀려온다, 추억이 가물거린다.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라디오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 갈래 머리 시절부터다. 감성이 풍부하다. 예민한 시기다. 이성에 눈뜨기 시작할 나이다. 어딘가에 푹 빠지는 때다. 구멍이 필요했다. 상고라 할 게 없었다. 공부에 신경도 안 썼다. 대학 갈 것이 아니었기에 관심도 없었다. 남들은 예비고사 준비에 한창일 때 난 라디오에 빠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젖었다. 유행가는 재주가 많다. 사람을 꼬신다. 사람을 적신다. 사람을 추억에 잠재운다. 사랑하게 만든다. 사랑을 잘 모른다. 사람을 잘 모른다. 그러나 가사는 모두 다 내 얘기다.

내 얘긴 아닌데 내 얘기다. 듣다 보면 그렇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편지 쓰는 걸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 편지를 쓰는 자세가 있다. 먼저 머리맡에 있는 라디오를 튼다. 주파수를 맞춘다. 음악을 듣는다. 편지지를 펼친다. 볼펜을 집는다. 볼펜을 돌린다. 가사를 음미한다. 가사의 주인공이 된다. 볼펜을 든다. 그렇게 나의 편지는 시작된다. 연애편지다. 첫사랑과 펜팔을 오래 했다. 먼 곳에 있는 친구였다. 자주 만나지 못한다. 만나지 못해도 마음은 애틋하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좋았다. 편지를 쓰고 있는 순간만큼은 행복하다. 음률에 맞춰 여백을 채운다. 맘에 안 들면 다시 쓴다. 종이를 구긴다. 구긴 종이는 머리맡에 수그리고 있다. 머리를 조아린 채 고개를 푹 숙인 채. 많이 쌓이면 휴지통으로 던진다. 슛 골인,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밤새도록 그렇게 쓴다. 완성도 못한 채 잠이 든다. 라디오는 혼자 떠든다. 밤이 새도록.

 이문세를 듣고 또 들었다. 별밤지기다. 밤의 대통령이었다. 이종환, 김기덕, 박원웅  정말  그들의 목소리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어도 별은 빛난다.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지 않아도 별은 빛난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시절이었다. 학창 시절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 모든 것이 빛난다. 교복을 입어도 반짝거렸고 가방을 들어도 멋졌다. 소녀의 마음도 반질거렸다. 소년의 마음도 껄떡거렸다. 버스 안에서 교복만 봐도 설레었다.

눈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때였다.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라디오를 오래 들었으나 엽서를 보내진 않았다. 남들이 엽서를 보내는 시간에 줄곧 연애편지만 썼다. 그것만으로도 바빴다. 엽서를 보낼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와 같이 펜팔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엽서를 자주 보내곤 했다. 어느 날은 당첨이 되었다며 좋아했다. 실제 읽여지기도 했다며 자랑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전화했다. 어느 방송국에 엽서가 당첨이 됐는데 상품이 이상하다고. 상품으로 옷감을 준 모양이다. 옷감만 주고 그곳에서 옷을 맞춰 입으라고 했단다. 정말 웃긴 일이었다. 하나의 상술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도

그 친군 수시로 엽서를 보냈다. 여전히 난 편지만 썼다.

  서울로 상경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생경했다. 불친절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먹고사는 게 빡빡했다. 외로웠다. 고독했다. 친한 친구가 옆에 없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기로 했다. 그 친구가 라디오다. 절대 삐지지 않는 친구다. 무조건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찾아온다. 언제나 똑같은 시간이다. 부드러운 목소리다. 낭만적이다. 사랑스럽다. 옆에 있으면 꼭 안아 주고 싶다. 자취방에 같이 살던 친구보다도 더 좋을 때가 많다. 그 친군 남자 친구 만나러 수시로 나간다. 남자 친군 유부남이다. 그때만 해도 난 그 친구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난 연애에 관해 잘 모른다. 사랑을 모른다. 연애박사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샛길로 빠질 줄 모른다. 그저 앞길만 간다. 그 친구가 간 길을 난 샛길이라고 부른다.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난 샛길. 그 친군 그 길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 무렵 나의 첫사랑, 편지하던 친구가 군대 갔다. 그래서 만날 친구도 없다. 편지지만 만지작거렸다. 라디오만 움켜쥐고 살았다.  

라디오 디제이가 제일 멋있다. 티브이는 아니다. 오로지 라디오다. 티브이에 나오는 예쁜 연예인은 저리 가라였다.

얼굴보다 목소리다. 난 그렇다.

목소리에 흠뻑 빠진다. 헤어나질 못한다. 매력적이다. 노래도 이야기도 마약 같다.

한번 들으면 젖어든다. 짜면 물이 주르륵 흐를 것이다. 특히 이문세 아저씰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다. 그러나 그리 많은 차이는 아니다. 그런데도 아저씨 같다. 어른 맞다. 모든 면에서 어른이다. 목소리도 노래도 어른이다. 그에 비하면 난 어린이다. 그러나 순수하진 않다. 세상에 때가 묻었다. 어느 정돈진 모른다. 그러나 라디오를 들을 때만큼은 순수해진다. 그래서 좋다. 순수가 좋다. 순수해지는 게 좋다. 마음이 여리다. 여려지는 게 좋다. 그래서 자주 듣는다. 때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그게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외로워서다. 외로움을 달래줄 뭔가가 필요하다. 그게 라디오다. 그만이 나를 채워준다. 그만이 나의 위로다. 위안이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잔잔하다. 스며든다. 스르륵 잠이 온다.

라디오는 사춘기다. 성장통이다. 볼이 빨갛다. 불그스레하다. 누가 한마디만 건네도 설렌다. 설레는 말이 아닌데도 두근거린다. 통통 뛰어가는 돌멩이다. 물 수제비다. 한 칸 건널 때마다 물방울이 튄다. 햇살이 번진다. 파문이 번진다. 이내 잠잠해진다.  

별이 빛나는 밤에만 듣진 않는다. 채널은 많다. 채널을 돌린다. 주파수가 많다. 환한 대낮에도 듣는다. 2시의 데이트 애청자였다. 김기덕입니다. 굵직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다. 친구는 직장 가고 혼자 방에서 뒹굴던 시절이었다. 라디오만 들었다. 방구석에 콕 처박혀서. 주파수만 돌리는 재미로 살았다. 그가 살아있어 나도 살았다. 견뎠다.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런 능력이 있다. 누구나 줄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그만의 리그다. 운동장은 넓다. 이곳저곳을 누빈다. 골대는 없다. 수비수도 없다. 선수는 한 명이다. 청취자는 엄청나다. 그중에 나도 포함된다. 선수는 아니다. 리그 밖에 서있다. 운동장 밖이다. 듣는 것만도 행복하다. 그 만의 감성이 있다. 아날로그 갬성이다. 멜랑꼴리 하다. 부드럽다. 바스락 소리가 난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다. 고이 간직한다. 특별한 보관법은 없다. 다림질이 필요 없다. 들을수록 윤기가 난다. 활력이 생긴다. 삶이 살아진다. 살아가게 만든다. 살아내게 만든다. 어느 날, 퀴즈를 들었다. 내가 아는 답이었다. 정답은 톰과 제리였다. 그동안 여러 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냥 듣기만 했다. 이번엔 한번 엽서를 보내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펜을 들었다. 엽서를 처음으로 보냈다. 그것마저 용기가 필요한 소녀였다. 그런데 그것이 당첨됐다. 연락이 왔다. 그때 실은 내 이름으로 하기 쑥스러워서 같이 사는 친구 이름을 대신 써 보냈다. 그 친구 허락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당첨된 것이다. 이런 일이 나한테도 생기는구나. 예전에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도 생겼다. 복권이 당첨된 것 같았다. 지금은 로또지만 그땐 복권이었다. 뛸 듯이 기뻤다. 방송국으로 오란다. 친구를 데리고 갔다. 그때 얼굴을 봤다. 연예인을 본 것이다. 멋졌다. 목소리만 멋진 게 아니라 실물도 멋졌다. 나에게만 그렇게 보였는진 모른다. 정말 꿈만 같았다. 사각 속에 갇혀 있던 목소리를 실제로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근 반 세근반 떨렸다. 이런 기분 첨이다. 참 묘했다. 상품은 화장품이었다. 상품을 내밀던 그 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은 라디오를 잘 듣지 않는다. 티브이가 재미난 것이 더 많다. 이제 난 아줌마다. 드라마를 즐겨본다. 예능보단 드라마다. 삶이다. 생활이다. 별이 빛나는 밤이다. 빛나던 빛나지 않던 밤은 온다. 밤이면 별이 뜬다. 별을 따라가면 목소리가 들린다.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의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감미롭다. 시절이 리플레이된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생각난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늘의 별만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빛을 받는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반짝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서로를 위해 반짝이는 것이다. 오늘 밤, 잠들기 전에 별을 꼭 만나야지. 반짝이는 생을 위하여,

우리 오늘 별 다방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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