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 앞의 계절 Jan 21. 2021

미아리 청춘

종로

                                             



스무 살을 미아리에서 보냈다. 청춘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순수하고 여렸다.  흑백 사진 같은 삶이었다. 흐릿한 안개로 시작되는 하루 같았다.

 여문 알갱이였다. 삐걱대며 뾰족하게 날이 선 채 살았다.  

더듬이를 세워야 했다. 살짝 비린내 나는 시절이었다.  어디로 튈지 나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모든 것이 불안했다.

서울은 나에게 빌딩이다. 너무 높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다. 고개를 들어야 겨우 보인다. 처음 서울 땅을 밟던 날을 기억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다. 면접시험을 보러 갔다.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에 내리자 빨간 빌딩이 눈앞에 있었다. 촌년이 보기엔 너무 높았다. 그렇게 높은 건물을 처음 봤다. 시골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버스도 많고 사람도 정말 많았다. 대우빌딩이었다. 건널목을 건너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들과 같이 면접을 봤다. 반은 붙고 반은 떨어졌다. 난 후자다.  

그때 학교 선배들이 점심으로 회냉면을 사줬다. 내륙에서 살던 난 회를 처음 봤다.

회 빼고 면만 먹었다. 생전 처음 보는 생선살이 무서웠다. 비릿했다.

서울 사람들은 이상한 걸 먹네, 이런 표정으로 냉면을 먹었다. 서울과 나와의 첫 대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직장을 다녔다. 고등학생 때 본 서울이 늘 아른거렸다. 왠지 서울로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시골은 고만고만했다. 내가 태어난 곳이었고 직장도 가깝다.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이 싫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환멸이 생겼다. 북적이는 서울로 가고 싶었다. 서울이 빨리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자석에 이끌리듯 서울로 상경했다.

 미아리, 처음 자취를 시작한 곳이다. 친구한테 얹혀살다가 후에 돈을 보탰다. 미아리 하면 한 많은 미아리 고개를 떠올린다. 유행가 때문이다. 나에겐 추억이 깃든 장소다. 청춘이 담겨 있다. 파란 물이 고여 있다. 출렁이던 시절이었다. 돈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좋았던 기억이 더 많다. 그땐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서너 정거장 정도는 거뜬했다. 물론 버스도 있었다. 일부러 한 두 정거장 전에 내린 적 많다. 걷고 싶어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거리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흥얼거리며 걷는 게 좋다. 누구의 방해도 없다. 버스 안에선 입을 꼭 다물고 있어야 한다. 떠들면 안 된다. 답답하다. 그럴 때 내려서 걷는다. 혼자 걷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자취방은 미아리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언덕이 높을수록 방값이 쌌다. 거리와 가격은 반비례다. 이십 분 정도 올라간다. 숨이 차 한숨 돌릴 때쯤에야 집이 나타난다.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다.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있다. 어깨를 기대야만 덜 춥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미아리는 겨울이 가장 힘들었다.

눈이 오면 길이 언다. 빙판길이 된다. 언덕이 심하다. 엉금엉금 걷는다. 연탄재를 뿌려야만 다닐 수 있었다. 그 길에서 서너 번 넘어진 적 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것만 빼곤 괜찮았다.

집이랄 것도 없다. 내 집이 아니다. 방 한 칸, 부엌 하나 달린 전세였다. 지금도 가끔 티브이에 쪽방촌이 나온다. 그런 쪽방은 아니다. 일반 주택가다. 언덕에 있다 뿐이지 집들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우리 집은 언덕 중간쯤에 있었다. 언덕 집이 좋은 점도 있다.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 그걸 즐겼다. 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좋다. 속이 탁 트인다. 답답한 서울 생활에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곳이 된 셈이다. 서울 생활은 위만 보고 살게 된다. 주변 환경이 사람을 각박하게 만든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이 유행했었다. 솔직히 그랬다. 사기 치는 사람도 많았다. 어떻게 하면 높은 빌딩에서 근무할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승진할까? 등등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찬 도시가 서울이다. 살벌한 곳에서 퇴근한다고 생각하면 한편으론 좋았다. 그런 날은 일부러 언덕 끝까지 올라간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집들은 한 폭의 그림이다. 다 내 눈 아래에 펼쳐져 있다. 크게 숨 한번 고르고 나면 다시 살아갈 기운이 생기곤 했다.

사는 건 빠듯했다. 라면도 간신히 사 먹을 정도였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다. 공중전화가 많았다. 20원이었던가? 기본으로 십 원짜리 몇 개는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서울살이가 고달플 때 필요했다. 힘들어도 잘 살고 있다고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그러면 안심이 되곤 했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서울살이가 살만해졌다. 그래야 만만해 보였다.

친구들과 종로를 쏘다녔다. 종로 가는 버스가 많았다. 지금처럼 학원들이 즐비했다.  

찻집에 들어가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음악을 듣곤 했다. 디제이에게 노래를 신청하곤 했다. 우리가 신청한 노래가 나올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신청곡이 나오면 신나서 따라 부르곤 했다. 죽치다 지겨우면 거리로 나온다. 걷다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걸음을 멈추고 듣곤 했다. 가사는 왜 그렇게 다 내 얘기 같을까? 한 소절 한 소절이 가슴을 콕콕 찌른다. 감수성 예민한 나이였다.

연말이면 보신각에 갔다. 한 해의 마지막을 종로에서 보낸 적 있다. 사람들과 우르르 몰려다녔다. 제야의 타종이 끝나면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사라진다. 33인의 종소리를 듣고 집까지 걸어간 적 있다. 꼭두새벽에 걷는 거리는 정말 신선하다. 춥지만 한가해서 좋다. 거리낄 게 없어서 좋았다. 가끔 택시만 오고 간다. 네온사인 반짝이는 서울은 화려하다. 옷깃을 올리고 장갑을 낀 채 거리를 활보했다. 밤이 새도록 걸었다.

하하호호 웃음이 넘쳤다. 추억의 한 장면이다. 지금은 돈 주고 하라고 해도 못할 것이다. 그 시절만 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 시절의 낭만이 깃들어 있다.

종로에서 놀다가 배고프면 무교동으로 넘어간다. 무교동에 가면 먹을거리가 많다. 매콤한 낙지볶음과 순둥순둥 한 순두부가 있었다. 그곳은 항상 사람들로 넘쳐난다. 기다려도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었다. 음식이 그만큼 맛있었다. 잊지 못할 맛이다. 그때의 맛을 잊지 못해 지금도 가끔 낚지 볶음을 해 먹는다. 그 시절만큼의 맛은 아니다. 그땐 맛으로 먹었던 게 아니라 추억으로 먹었나 보다. 순두부도 가끔 해 먹는다. 역시 그 맛은 아니다. 레시피를 따라 해도 맛은 그저 그렇다. 그 시절 맛은 아니다.

음식의 맛보다는 시절의 맛이 곁들여 있어서 그런가 보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시대의 맛이라고나 할까?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다. 음식에도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그 시절이 아니면 그런 맛이 나오지 않는다.

두 번 다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은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레시피를 검색한다. 오늘 저녁엔

매콤하던 그 시절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고구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