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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11. 2021

귀뚜라미

보일러

                                                            



집에 귀뚜라미 한 마리 키운다. 엄청나게 크다. 손으로 잡을 수 없다. 사시사철 있다. 집 안에서 키우기엔 너무 커서 베란다에서 키운다. 가을의 전령사로만 알고 있는 귀뚜라미는 아니다. 귀뚤귀뚤 울지 않는다. 풀뿌리도 없다. 돌멩이도 없다. 팔짝팔짝 뛰지도 않는다. 텃세가 심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있다. 

시골 장례식에 다녀왔다. 4시경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냉수는 나오는데 이런 일도 있나? 앞 뒤가 맞지 않는다. 냉수 온수 다 안 나오면 말이 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온수만 안 나오는 일이 생겼다. 예전에 보일러가 고장 난 적 있다. 그땐 수돗물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 아파트에선 날마다 방송한다. 날씨가 추우니 수돗물을 틀어 놓으라고 방송한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한다. 저녁마다 수돗물을 틀어 놓고 잤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의아하다. 믿기지 않는다. 관리 사무실에 전화했다. 아저씨가 왔다. 보일러를 한참 보더니 온수 쪽이 언 것 같단다. 그리곤 보일러 회사에 전화를 해보란다. 자기가 할 영역은 아니라며 돌아갔다. 우리 아파튼 제대로 해주는 게 없다. 진단하고 처방은 해준다. 약은 본인이 알아서 돈 주고 사란다. 의약분업처럼 분업이 원칙이란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니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현관 벨이 고장 나서 전화를 한 적 있다. 그때도 그랬다. 뜯어보고는 입주민이 고쳐야 한단다. 부품이 없단다. 너무 오래된 구제품이란다. 진단만 하고 그냥 간다. 내가 새 제품을 사서 다시 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관 벨은 아직도 되지 않는다. 요즘은 특별히 벨이 필요 없다. 택배도 문 앞에 두고 가는 시대다. 언택트 시대인 게 다행이다. 현관 벨이 안 되는 게 문제 될 건 없다. 나도 너무 느긋한 게 문제긴 하다. 중요치 않다. 어차피 찾아올 손님은 없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오고 가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현관 벨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보일러 회사에 전화했다. 녹음된 그녀가 나온다. 대기자만 70명이란다. 포기했다. 그 시간을 기다리기 싫다. 기다릴 자신이 없다. 포기할 건 빠를수록 좋다. 그다음 무얼 할 수 있을까? 검색했다. 요즘은 검색만 해도 답들이 주르륵 달려 나온다. 온수가 안 나올 경우의 수에 대한 대처법을 찾았다. 드라이기를 사용해보란다.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보일러실은 베란다라 더 춥다. 환기 때문에 바람도 드나든다. 단단히 옷을 챙겨 입는다. 두툼하게 입고 장갑도 낀다. 드라이기를 들고 수도꼭지 주변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자세는 엉거추춤하다. 불편하다. 한 시간 그러고 나니 온몸이 쑤신다. 그래도 온수는 나오지 않는다. 잠시 쉰다. 쉬운 일은 없다. 참고로 난 기계치다. 마이너스 손이다. 만지면 만지는대로 고장 난다. 아예 건드리지 않는다. 안 만지는 게 도와주는 거다. 내가 만지면 될 것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나 밖에 없다. 신랑이 오기 전에 해봐야 한다. 그런 심정으로 다시 드라이기를 들고 보일러 실로 향한다. 두 시간을 밖에서 드라이기와 보일러와 싸웠다. 그 결과 온수가 쫄쫄 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콸콸 나와야 하는데 겨우 졸졸거리기만 한다. 완전히 된 건 아니다. 

신랑이 왔다. 온수가 안 나오니 닦을 수도 없다. 소식을 듣자마자 보일러 실로 직행했다.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온수를 연결한 열선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수만 안 나온 것이다. 신랑은 열선과 보온재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배관을 계속 드라이기로 녹이고 있는데 갑자기 물이 터져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 순간 밖에 나갔던 신랑이 왔다. 내 말을 듣자마자 계량기를 껐다. 수도랑 연결된 배관이 빠져버렸다. 

이런 걸 보고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말을 한다. 신랑은 그걸 고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나사를 조여봐도 껴지기가 않았다. 할 수없이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친구가 퇴근길이란다. 필요한 부품을 가지고 온단다. 그동안 열선을 감고 보온재를 감싼다. 친구분이 와서 배관을 연결했다. 그래서 온수는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언 것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드라이기로 한 참을 더 녹인 후에야 온수가 나왔다. 이로써 한바탕 소동은 끝이 났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도 수도가 언 적 있다. 그땐 설비하는 분을 불렀다. 신랑이 출장 간 상태라 방법이 없었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십만 원 들었던 것 같다. 두 분이 오셨다. 고장 난 집들이 많아서 저녁도 못 먹었다며 컵라면이라도 끓여 달라고 해서 끓여 준 적 있다.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며 한 숨을 쉬셨다. 그대도 지금처럼 전화 통화도 힘들 때였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질병 같다. 코로나 시대라는 것도 힘든데 보일러까지 속 썩이니 속상하다. 

우리 집 보일러는 귀뚜라미다. 귀뚜라미는 이제 잘 운다. 귀뚤귀뚤 잘 돌아간다. 이 귀뚜라미는 계절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을 조심해야 한다. 귀뚜라미에게 낡은 옷을 입혔다. 나에겐 낡은 옷이지만 귀뚜라미에겐 새 옷이다. 옷을 입은 귀뚜라미는 당분간 추위를 타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겨울을 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춥지 않은 겨울을 위해서다. 귀뚜라미는 베란다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한눈팔지 않고 겨울을 지킨다. 경계를 지키는 자다. 계절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오늘도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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