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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Feb 16. 2021

부치지 못한 연애편지

넌 누굴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비밀이다. 병 속에 갇혀 있던 얘기다. 솔직히 말해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다. 누구나 비밀 한 가지씩은 있다. 실존하지 않는 방 하나가 있다. 마음의 방이다. 가끔 그 방에 들어간다. 그 방 열쇠는 나만 가지고 있다. 조용히 들어갔다 조용히 나온다. 비밀은 쉽게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밀이다. 꺼내기 민망하다.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막상 하려니 별것도 아니다. 별것도 아닌데 마음속에 쌓아 놓은 이야기다. 정리 차원에서 짐을 좀 덜어내려 한다. 많은 것들이 쌓여 있다. 몸속에 여러 장기들이 있듯 마음속에도 그런 것들이 있다. 종류도 다양하다. 오늘은 그중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한 가지를 꺼내 보려 한다. 호퍼의 '햇빛 속의 여인'을 떠올린다. 발가벗은 여인의 육체를 상상한다. 그것이 아니라도 좋다. 왠지 나를 발가벗기는 느낌이 든다. 그 여인은 노란 사각형 빛에 갇혀 있다. 유리창으로 파란 하늘이 그려져 있다. 벽에 액자가 걸려있다. 사각형 속에 갇혀 사각형을 바라본다. 우린 사각형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녀도 나도. 그 사각형은 빛이기도 하고 그림자이기도 하다. 현재이기도 하고 과거이기도 하다. 우린 그녀가 벗어 놓은 구두처럼 어딘가에 신발을 벗어 놓고 살고 있다. 신발을 벗는 순간, 외부와 차단된다. 외부와 차단된 그곳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오로지 나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 나만의 방이 있다. 나의 또 다른 자아가 그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현재에서 그곳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다. 그곳도 사각이다. 사각에서 사각으로 들어가는 문도 사각이다. 드르륵 문이 열린다. 미닫이 문이다. 교실이다. 책상이 있고 의자가 있다. 칠판이 있고 분필이 있다. 창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본다. 널따란 운동장이 보인다. 플라타너스들이 줄지어 서있다. 다시 시선을 사각으로 불러들인다. 그곳엔 나의 또 다른 자아가 살고 있다. 나의 자아를 아주 먼 곳으로 이송시킨다. 이 곳엔 나의 유년 시절이 액자처럼 박혀 있다. 나의 머릿속엔 딱 한 사람이 맴돌고 있다. 그 친구는 휘파람 소리 같다. 휘파람 소리는 가늘고 키가 크다. 홀쭉한 소리를 따라 살짝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그 소리는 이곳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다른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다. 우리 교실에선 휘파람 불 줄 아는 친구가 없다. 어느 날부터 나는 그 휘파람 소리에 이끌려 다녔다. 그 소리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되었다. 옆 짝꿍 한데 물어본다. '어디서 휘파람 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니?''아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는 친구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에겐 항상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휘파람 소리의 근원지를 알아야 했다. 우리 교실 바로 아래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우리 교실은 여학생만 있는 반이다. 그 아래 교실은 남학생만 있는 교실이다. 바로 그 남학생만 있는 교실에서 들리는 소리다. 난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그쪽으로 갈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볼일이 있는 척 그 복도를 지나치곤 했다. 수학 시간이었다. 수학 선생님도 키가 크고 훌쭉했다. 그 선생님 시간에 우리 몇 명은 이의를 제기했다. 나포함 세명이었다. 잘난 척하느라 선생님 실력이 형편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화가 난 선생님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땐 매가 훈육의 방편으로 많이 쓰였다. 걸레질하던 마포대로 몇 대 때리더니 우리를 그 아래 반, 남학생 반 복도에 가서 손들고 있으라며 밖으로 내몰았다. 수업 시간 중간에 우린 남학생반 복도 한쪽 벽면에 조르륵 손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휘파람 소리가 들리던 때가. 양 손을 번쩍 들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나의 귓속으로 휘파람 소리를 불어대는 친구가 있었다. 그 소리는 은은하면서도 귀에 와서 쏙쏙 박혔다.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비밀의 주인공이다. 휘파람 소리는 수업이 끝나는 시간까지 계속됐다. 우린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선생님이 우리를 그곳에 처박아놓고 해제를 시켜주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

는 종소리가 울리자 남학생들이 줄줄이 복도로 나온다. 창피한 나머지 우린 숙였던 고개를 아예 복도에 박다시피 했다. 혹시나 휘파람 소리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기라도 하는 날엔 볼짱 다 본거야. 너무 창피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의 이런 모습마저 휘파람 소리가 봐주길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창피한 모습마저도 휘파람 소리가 봐준다면 나에겐 그보다 더 좋은 영광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난 지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다리밖에 없다. 그러나 걱정할 건 없다. 휘파람 소리의 다리는 다른 사람의 다리와 다르다. 휘파람 소리의 다리는 길이가 다르다. 그리고 살짝 다리를 전다. 대칭이 맞지 않는다. 바닥으로 내리 깐 눈으로 난 지나가는 다리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잰 아니고, 재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많은 다리를 본 적이 있었던가? 되짚어 보지만 결단코 그런 적은 없다. 지나가는 수많은 다리 중에서 그를 찾아내기란 어렵다. 물론 살짝 다리를 절며 걷는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휘파람 소리를 찾아낸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열심히 그 다리를 찾았다. 그러나 결국 그 다리를 찾지 못했다. 혹시나 휘파람 소리는 그 시간에 교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리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다 순간, 그 반 수업을 마친 선생님 소리가 들린다. 그 선생님은 예전에 검도 선수였다. 늘 죽도를 가지고 다녔다. 때론 매로 사용하기도 했다. 다닐 때는 항상 그 죽도를 바닥에 땅땅 치며 다닌다. 그래서 그 선생님인 줄 갈게 된다. 죽도를 바닥에 치며 우리 앞으로 걸어온다. '이것들 봐라,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 와서 이러고들 있어, 꼴좋다, 어디 고개 좀 들어봐?' 우린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우리가 고개를 들지 않자 '창피한 줄은 아나 보네' 하더니 스쳐 지나간다. 우린 여전히 손 들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있다. '도대체 수학 선생님은 우리를 언제 풀어주시려나' 도무지 풀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다른 수업시간이다. 남학생들은 화장실은 이미 다 다녀온 것 같다. 복도를 거니는 발자국 소리는 별로 없다. 다들 유리창 안에서 우리를 엿보고 있다. 슬쩍슬쩍 쳐다보는 눈길 속에서 휘파람 소리만 들렸던 거야. 아쉬운 마음만 커진다. 스쳐 지나간 건가 아니면 아예 안 나온 건가 알 수 없다. 지나가는 다리들 속에서 너를 찾기란 너무 어려워. 알 수 없는 휘파람 소리만 들렸지. 고개를 들 수도 없는 안타까움만 더해갔어. 창피한 줄 모르던 시간은 이제 끝나가는 중이야. 수학 선생님 시간이 이제 거의 끝나가거든. 수학선생님도 그것쯤은 알지. 다른 선생님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간단한 사실 정도는 알지. 우린 이제 그 복도에서 벗어날 거야. 그 복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제 그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 휘파람 소리를 듣기 위해선 언제나 그 복도에 있어야 하거든. 그 소리는 그 복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야. 언제나 그 복도에 서면 그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지금도 그 복도에 가면 휘파람 소리가 들릴 거야. 그러나 그 휘파람 소린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아. 오직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야.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거든. 수업 종이 울리기 몇 분 전에 수학 선생님은 우리들 곁으로 오셨어. 그리곤 '다들 일어나, 교실로 들어가' 하셨지. 우린 얼른 일어섰어. 세명은 고개를 숙인 채 얼른 그 복도를 지나 우리 반 복도 쪽으로 걸어갔어. 교실로 들어가자 친구들 눈빛이 따가웠어. 하지만 어떤 친구들은 그런 말을 해줘서 속 시원하다는 친구들도 있었어. 그땐 그랬어. 친구들의 대변인 역할을 한 적도 있어. 무서운 게 없던 시절이었어. 선생님 조차 무섭지 않았거든. 뭘 믿고 그랬는진 잘 모르겠어. 반항아 기질이 가장 강했어. 하늘 높은 줄 몰랐어. 그런 와중에 휘파람 소리를 좋아했지. 살짝 삐걱이는 걸음걸이가 좋았지. 남들은 그것 때문에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것 때문에 좋았어. 이런 나, 억지로 이해하려 들지 마. 안 그래도 돼. 어떤 때는 목발을 짚고 다니기도 해. 그러면 또 난 안쓰러운 얼굴로 먼발치의 휘파람 소리를 훔쳐보곤 해.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휘파람 소리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시절 내내 난 휘파람을 훔쳐보고 있었지. 관종 기질이 그때부터 있었나 봐. 물론 그때 이후론 휘파람처럼 오직 한 사람만 쳐다보고 살진 않았어. 시대가 변하면서 나도 변했지.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 방엔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있어. 아직도 은은한 목소리로 휘파람을 불고 있는 소리가 들리곤 해. 휘파람은 나의 뮤즈였어. 단 하나밖에 없는. 난 그 뮤즈를 언제 마주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학교를 다녔어. 왜 좋았냐고 누가 물어보면 말할 수 있어. 공부도 잘했고  미루나무처럼  키도 훌쩍 컸지. 거기다가 난 그가 늘 안쓰러웠어. 살짝 짝다리로 걸어가는 모습조차  멋있었지. 난 좀 특이한 사람을 좋아했던 것 같아. 다들 그 친구를 무서워했어. 성격이 괴팍하다고 소문이 자자 했거든. 어차피 소문 이잖아. 그건 나에겐 아무런 상관없어. 그냥 그에의  모든 게 좋았어. 몸이 절뚝이면 마음도 절뚝인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상관없어. 남들이 회피해서 난 더 좋았으니까.

'너도 한번 들어볼래, 그 친구 휘파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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