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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Feb 17. 2021

재봉틀

  

  난 새발 뜨기를 할 수 있다. 일부러 배운 것은 아니다. 새발 뜨기라는 말도 모른 채 새발 뜨기를 했다. 수많은 엑스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집은 양복점이었다. 양복점 하면 멋진 신사복을 상상한다. 양복점인데 양복을 만들진 않는다. 그 대신 학생복을 만든다. 중학생 교복이다. 그것도 남학생 교복만 만들었다. 여름 하복을 주로 만들었다. 동복은 바지만 만들었다. 왜 그런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만들기 쉬운 것들 위주로 만들었던 것 같다. 거기다가 양복을 하려면 원단 값이 비쌌다. 그러다 보니 쉽고 싼 재료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난 어려서 관심이 없었다. 양복점엔 일하는 오빠가 2명 있었다.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면서 가게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가게는 여름이 제일 바빴다. 하복을 맞추러 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멋진 오빠들이 교복을 맞추러 오면 할 일이 없어도 가게를 들락날락거렸다. '오늘은 멋진 오빠들이 별로 없네' 그런 날은 그냥 밖에 나가 놀았다. 가게가 바쁠 때는 오빠랑 남동생, 언니까지도 가게일을 돕곤 했다. 아버지는 재봉틀을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재단하고 남은 헝겊 쪼가리에 기름을 묻혀 반질반질 윤기가 날 때까지 닦곤 했다. 우리 집 수입은 재봉틀에 달려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로 되어 있었다. 안채는 살림집이고 바깥채는 가게였다. 가게에 달린 방도 하나 있었다. 가겟방에서 일하는 오빠들이 먹고 자고 했다.  다림질과 바짓단 바느질 정도를 도왔던 것 같다. 난 그때 바느질도 하지 못하던 어린 나이였다. 물론 면서 저절로 하게 되었다. 엄마는 집 식구들과 객식구까지 식사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초등학생인 나도 여러 가지로 바빴다. 그 당시엔 새벽에 학교 운동장으로 불려 나가는 일이 많았다. 학교 운동장으로 눈을 쓸러 가거나 학교 주변 청소를 해야 했다. 말하자면 강제 노역이었다. 그땐 선생님들이 나오라면 나가는 시대였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몇 달 동안은 신문 배달을 하기도 했다. 그 돈으로 무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신문배달을 했다는 사실을 형부가 대신 증명해주곤 한다.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 드르륵드르륵 재봉틀 소리를 신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동네 아저씨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양복점 집 딸이구나'를 알람 소리처럼 반복하곤 했다. 나의 놀이터는 학교와 동네 골목 그리고 우리 집 앞이었다. 특히 우리 집 앞에 국수가 널리는 날은 숨바꼭질도 가능했다. 도로 건너편에 방앗간이 있었다. 그 집은 남동생 친구네 집이다. 그 집에선 떡도 하고 국수도 했다. 국수를 하는 날엔 국수를 우리 가게 앞 공터에 널어놓곤 했다. 그 집은 국수를 걸 어놀만 한 공간이 없었다. 집 앞이 바로 도로였기 때문이다. 긴 장대를 설치해놓고 하얗고 긴 면발을 척척 걸쳐 말렸다. 우린 면발 사이를 헤치고 다니다 몰래 한두 개씩 끊어 입속에 넣곤 했다. 마르기 전이라 살짝 말랑말랑하다. 익히지도 않은 국수를 뚝뚝 끊어먹곤 했다. 지금은 이런 광경이 거의 없다. 지금은 국수공장에서나 볼법한 풍경이다. 아버지는 옷감에 쵸크를 그리며 옷을 재단하곤 했다. 색색의 초크 조각은 우리의 장난감이었다. 바닥에서 자투리 천을 주워 거기에 산도 그리고 나무도 그리며 놀았다. 양복점은 점차 일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학생복을 못하게 됐다. 다들 시내로 나가서 학생복을 맞추는 시대가 됐다. 자연스레 학생복을 맞추러 오는 학생들이 없어지고 양복점은 한산해졌다. 일하던 오빠들을 내보내야만 했다. 어떤 날은 아버지 혼자 해도 일거리가 없는 날도 있었다. 일이라곤 다림질 거리나 수선 거리가 전부였다. 바늘귀처럼 생활이 얇아졌다. 그 시절 언니는 학교에 갈 때마다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 시절만 해도 학교에 내는 육성회비가 없어 늘 선생님한테 불려 갔노라고 말한다. 지금도 그 시절 얘기를 하면 언니는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만큼 사는 게 힘들었다. 삶은 바짓단과 달랐다. 바짓단은 실로 꿰맬 수 있었지만 우리 집 살림은 꿰매어지지 않았다. 먼지만 풀풀 날리는 가게가 되어가고 있었다. 노루발 소리로 장단 맞출 일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생활은 다림질로도 펴지지 않았다. 양복점은 점점 있으나 마나 한 가게가 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 다기 아버진 병까지 얻었다. 폐결핵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비쩍 마른 체격은 더욱더 말라갔다. 자식들은 하나둘씩 결혼해서 고향을 떠났다. 양복점을 하는 것이 무리라 생각한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던 언니를 불렀다. '네가 저 재봉틀 가져가서 한번 해 봐라' 언니는 아버지 말에 순순히 따랐다. 언니는 가게를 얻고 아버지 재봉틀을 실어갔다. 아버지의 혼이 담긴 재봉틀이었다. 아버지 전재산이었다. 목숨처럼 아끼던 재봉틀이었다. 아프시기 전까지 늘 줄자를 목에 걸고 노루발을 구르던 발자취가 숨 쉬고 있는 재봉틀이다. 그 재봉틀은 지금도 언니네 가게에 있다. 아버지가 쓰던 상호도 그대로 언니가 이어받아 쓰고 있다. 일본의 경우 가업을 이어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가업을 이어받아하는 경우가 있다. 뉴스나 방송을 보면 그런 경우가 간혹 있다. 우리 가족도 언니가 아버지 가업을 이어받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버지 때 가장 일을 많이 도와주던 오빠나 남동생이면 몰라도 언니는 의외였다. 그런데 하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하고 있다. 어렸을 때 해 본 기억이지만 나름대로 손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난 재봉질을 못한다. 어떻게 양복점 집 딸이 그것도 못하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다. 난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하려고 들지도 않았던 것 같다. 뭐든지 본인이 하려고 해야 일을 배우는데 난 그게 없었던 것 같다. 언니네 가게를 가면 아버지가 그곳에 있다. 재봉틀로 살아 계시다. 노루발을 구르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은 먼지가 되어 보풀이 되어 폴폴 날아가는 나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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