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십, 우리 엄마 나이다. 아니 벌써라는 말이 실감 난다. 난 산울림의 아니 벌써라는 노래를 듣고 자랐다. 그 노래가 유행할 당시 다방면으로 그 노래 제목을 써먹곤 했다. 지금은 아니 벌써라는 말, 우리 엄마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엄마가 벌써 구십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시골집에 갈 때마다 엄마를 보면 나이가 실감 난다. 검버섯이 늘어간다. 이빨은 없어진 지 오래다. 틀니를 꼈다. 보청기도 했다. 허리는 굽었다. 가끔 지팡이를 짚어야 한다. 기억이 가끔씩 외출한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손이 쪼글쪼글하다.
그래도 손바닥은 아직도 보들보들하다.
고향집에 가면 맨 처음 하는 일은 엄마를 품에 꼭 안아주는 일이다.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 생각이 절절하다. 우리 가족들 중에서 엄마를 안아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물론 다른 가족들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충청도 사람이라 표현력이 부족하다. 예전엔 나도 그랬었다. 누구를 만나도 그냥 무덤덤했다.
그런데 자꾸만 늙어가는 엄마를 보며 생각을 바꿨다. 나만이라도 바꾸어 보자 싶었다. 엄마는 혼자 산다. 집에 갈 때마다 소파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인다. 안쓰럽다. 모시고 살지 못하니 다른 거라도 해야지 하며 찾아낸 것이 겨우 안아 드리는 일이다. 엄마 품에서 벗어날 때도 난 엄마를 다시 꼭 안아준다. 그리곤 내가 사는 집으로 온다. 고향집에 도착할 때와 고향 집을 떠날 때 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엄마는 혼자가 편하다고 늘 말한다. 결혼한 남동생이 최근에 장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물론 엄마한테는 죄송한 마음에 모두 비밀로 했다. 그러나 그 비밀은 비밀이 되지 못했다. 아무도 말을 안 했으나 엄마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만큼 눈치가 빠르다. 말해주지 않아도 무언가 낌새를 눈치채셨다. 우린 그저 묵묵부답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생이 장모님 모시고 산다는 걸 알면서 그래도 무언가 궁금할 때는 슬쩍 나에게 확인차 물어보곤 한다. 그래, 그 장모는 그 나이에 꼭 애들과 같이 살고 싶대니? 하신다. 누구 불편하게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좋지 자식들 불편하게 꼭 그렇게 같이 살고 싶다니? 하신다. 내가 엄마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을 때마다 툭 툭 한 마디씩 불평하듯 내뱉곤 하신다.
아무래도 당신을 모시고 살진 않으면서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아들이 못마땅한 것 같다.
고향에 가서 잠을 잘 때면 난 엄마 손을 꼭 잡고 잔다. 자주 못 가는 처지라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야 엄마 체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매일 혼자 자는 잠인데 얼마나 외로우실까 생각하면 시골집에 있을 때만이라도 꼭 같이 잔다. 그렇게 손을 잡고 자다 보면 어느새 내 손을 따로 떨어져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엄마 손과 떨어진 것이다. 어쩌면 사는 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잡았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나의 잠버릇처럼......
엄마는 주간보호센터에 다닌다. 약간의 치매기가 있다는 의사 선생님 의견을 참고했다. 그 전 까지는 가스레인지에 압력밥솥에다 스스로 밥을 해서 드셨다. 나는 전기밥솥을 쓰지 압력밥솥을 쓰진 않는다. 그런데도 엄마는 굳이 가스레인지로 밥을 해서 드셨다. 그래야 밥맛이 좋다며 고집하곤 했다. 가끔 내가 시골집에 가면 엄마한테 물어보고 밥물을 넣는다. 밥을 한 다음 뜸을 들일 때도 엄마에게 물어보고 가스를 잠그곤 했다. 그만큼 신경을 써야 하는 가스레인지 밥이었다. 그랬던 엄마였다. 그러나 이젠 엄마도 늙었다.
엄마가 마실을 가듯 정신도 가끔 마실을 갔다.
가끔 집을 못 찾아오는 일이 생겼다. 밥도 태워먹었다.
난 그 정도라는 사실을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어쩌다 보는 나로선 그런 구체적인 것 까지는 알 길이 없다.
옆에서 보던 오빠와 언니가 보기에 심하다 싶었나 보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했다. 회의 끝에 결정을 내렸다.
혼자서 집에서 밥해먹고 하느니 센터에 가시는 편이 나을 거라고 다들 동의했다.
엄마는 처음엔 반대했다. 아마 당신을 이상한 곳으로 보내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설득하는데 오래 걸렸다.
무엇이든 처음은 어렵다. 생각지도 않던 시설로 보내진 다는 사실이
엄마는 믿기 어려웠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던 것 같다.
가족들 모두가 엄마를 오랜 시간 설득해야만 했다.
오랜 숙고 끝에 가기로 결정했다.
엄마는 오빠와 함께 주간보호센터로 견학을 갔다.
입학 전에 미리 학교를 구경시켜준 것이다.
우린 가끔 센터를 학교라고 부른다.
처음 입학하는 학생처럼 말이다.
엄마는 경건한 자세로 학교에 간다.
새벽에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입는다. 평소엔 잘하지도 않던 목욕이다.
그런데 센터를 다닌 뒤부터는 맨날 치르는 의식이 되었다.
신나는 학생이다. 가방은 없지만
정말 신나라 하며 센터에 간다.
내가 볼 때도 정말 신나 보인다. 전에는 할 일 없이 그냥
티브이나 보던 할머니에서 이젠 센터에 나가는
할머니가 된 것이다.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엄마를 활기차게 만든다. 집에선 늘 혼자다.
말할 사람이 없다. 센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많다. 할아버지들도 있다.
더군다나 센터에선 별걸 다 해준다고 자랑한다. 때 되면 밥도 주고 간식도 주고 너무 좋다고 말한다.
솔직히 나도 그렇다. 누가 밥을 대신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것만큼 좋은 건 없다. 아마
엄마도 그 점에서 좋다고 말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도 시켜준단다. 집에서 목욕하고 왔다고 해도 꼭 다시 해준단다. 그래야 자기들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손톱과 발톱도 깎아 준단다. 그 이야길 듣고 보니 내가 엄마 손톱 발톱을 깎아 준 적이 언제였나? 생각해봤다. 별로 없던 것 같다.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엄마에겐 잘 된 일이다. 우리가 못해주던 일들을 거기서 대신해주니 말이다. 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집에 혼자 계실 때는 이야기도 한정돼 있었다. 가족들 이야기나 옛날이야기 정도였다. 그런데 센터에 다니고부터는 이야기 폭이 넓어졌다. 한마디로 유식해졌다. 사람들이 많은 데서 있다 보니 많은 이야기들을 듣나 보다. 일본이 어떻다느니 코로나가 번졌다느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가끔 하신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이 정말 신나 보인다.
학교 다니는 학생처럼 오늘은 반찬이 뭐였고
누구는 어떻고 계속 이야길 하신다.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센터에 잘 적응하는 엄마가 다행이다.
가끔 엄마한테 전화를 한다. 핸드폰이 아니라 시골집 전화로 건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면 잘 안 들리시는지 잘 못 듣는다. 그래서 집 전화로 건다. 엄마는 센터에서 저녁 6시경에 집으로 온다. 그래서 저녁 6시 10분경에 전화를 하게 된다. 그냥 안부 전화다. 잘 계시는지 센터는 재미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정도의. 그 정도의 말이 끝나면 내가 뭐라고 다른 말을 할라 쳐도 먼저 뚝 하고 전화를 끊으신다. 전화를 끊는 속도는 정말 빠르다. 아마 순삭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순식간에 전화를 끊을 줄 아는 센스쟁이 엄마다. 오늘 저녁에도 엄마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리운 나의 엄마, 우리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