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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Oct 03. 2021

삶과 죽음 사이 그 좁힐 수 없는 경계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소 내 전공이 아닌 분야에 관심이 많은 편인지라 유튜브를 통해 짧게 편집되어있는 영상을 통해 타 전공의 지식을 귀동냥, 눈동냥하는 편이다. 특히 인문학, 물리학 부류를 많이 보는 편인데, 최근 물리학에서 상대성 이론이 대중적이게 되면서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시간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본디 시간이란 '빛'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발생된 것인데, 아주 간단하게는 모종의 원인으로 발생한 '빛'이 '공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었고 그로부터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달은, 아니 아주 가깝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모니터 화면은 0.00000.. 1초 정도 전의 화면이라는 뜻과 동일하다. 어찌 되었든, 


 그런데, 그 시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보고 동영상을 시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영상의 내용은 상대성 이론에 입각한 4차원 세계의 이론을 철학적 관점과 섞어 설명하고 있었다. 4차원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3차원 개념에 시간의 축이 추가된 것인데, 개인적으로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이 3차원의 생물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혹시 개념이 궁금하다면 영화를 참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결론적으로 4차원의 세계를 예시로 들면 이미 시간이라는 축은 만들어져 있으며 그 축은 직선이기에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고 그 직선을 토대로 우리가 3차원 개념으로 인식 가능한 과거, 현재,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2차원 세계의 생물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3차원의 사과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 4차원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추론할 수 있을 뿐. 따라서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한들 우리는 그 미래에 도달할 수도, 미래를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과거란 이미 지나간 추억으로 인감의 5감을 통해 남아있고, 현재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며, 미래는 앞으로 다가올 것으로 수학적 증명을 통해 예측해 나가고 있다. 물론 나의 한날한시 알 수 없는 삶의 끝은 제외하고 말이다. 


 응급실에서 일을 하다 보면 이미 기저질환으로 많이 질병이 진행되신 분들과 혹은 정말 예기치 못하게 운명하게 되신 분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끝끝내 가족들과 상의해 정말 어렵게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도 많았지만, 요즈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게는 혹은 나의 부모님에게는 얼마만큼의 미래가 존재하고 있을지 어떻게든 예측하고 싶어 지게 된다. 나에게 4차원적인 힘이 있어 시간의 축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 미래를 들여다보고 미리 준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굴뚝만 같다. 그들을 보아 예측해 보건대, 내게 주어진 시간은 평균 넉넉잡아 20-30년 사이일 것이다. 


 얼마 전 부고가 있었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웃으며 기억을 한 대화가 있는,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주고받곤 했던 친구의 부모님이 아닌, 본인 부고였다. 부고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나에게는 절대 상정할 수 없는 범위의 친구였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고 근무를 마치고 곧장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빈소 앞에 여럿 보였고 빈소에 걸려있는 그 친구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도 몇 년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털 끝만큼도 감이 안 오는 분위기 속에서 친구 덕에 모이게 된 자리에서 익숙한 얼굴들과의 대화를 짧게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있었던 일이라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은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신의 영역을 노리는, 인간의 이기심을 향한 현실적 비판이라고 생각했다. 끝없이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빗발치고 있지만 그 노력 속에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지는 않은가 싶다. 언젠가부터 공연을 가거나, 좋은 광경을 보게 되면 카메라부터 켜는 습관을 버리게 되었다. 지금 그 순간, 지금 그 장면을 보면서 반응하고 있는 내 피부의 털들이 일어나는 그 순간의 움직임을 충분히, 최대한 인지한 뒤에 움직이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아니, 이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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