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관계가 타들어간다.
조언과 잔소리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말투, 몸짓, 표정에서도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화자 간의 평소의 신뢰도 차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서로 간의 유대감이 잘 형성되어 있는 관계라면 대부분의 말들이 조언으로 느껴질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잔소리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그 유대감을 나타내는 특별한 단어가 존재한다.
의학용어 중에는 라포(rapport)라는 단어가 존재하는데 이는 보통은 의료진과 환자와의 신뢰관계를 이야기한다. 단순히 친구관계에서의 신뢰관계보다는 치료과정 속에서 환자가 의료진에게 갖게 되는 조금 더 깊은 신뢰관계를 뜻한다. 하지만 누구든 서로의 정신적 의료진, 환자가 될 수 있으므로 친구 사이나 직장동료 간에도 라포라는 관계는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라포의 형성의 부재는 간호사회에서 '태움'이라는 문화를 낳게 했다.
최근 과거 군대의 부조리를 내용으로 한 드라마가 핫이슈가 되었다. 그 당시의 군대를 경험한 남자들에게 굉장히 큰 공감을 샀던 것이 컸다. 그리고 군대 못지않은 분위기로 유명한 직업군이 바로 간호사이다. 군대에 부조리가 있다면 간호계에는 '태움'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데 이는 선임 간호사가 후임 간호사를 혼낼 때 활활 태우듯이 혼낸다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혼내길래 불이 탈 때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실수를 했다 하면 전 간호사가 보란 듯이 몰아세우며 소리를 지르거나,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데려가 폭행을 하는 경우도 있고, 지속적인 폭언으로 부서 내에서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 정말 몹쓸 짓이다. 간호사라는 직업의 사직률, 이직률이 높은 것도 이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몇 년 전 이런 문화 속에서 활짝 필 수 있었던 꽃들이 지기도 했다. 꽃이 지고 나서야 사회는 물을 주기 시작했지만 꽃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속해 있는 곳에서는 그런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동료 간의 관계 속에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들은 꽤나 많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작 가해자들은 자신이 행한 행동들이 그런 결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로서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는 않았었는지는 확신을 할 길이 없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라포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의 언행이 그에게 불이 되지 않도록 미리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그대는 나를 태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타는 것은 내가 아니다. 타는 것은 그대와 나의 관계이며 그 관계가 타고 바스러져 없어지면 그대는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대는 나에겐 없는 사람이 된다.
태워서 없어진 것은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