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무언유골(無言有骨), ‘버릴수록 채워지고’

고성 화암사

by 갈잎의노래


산사는 고요했다.

마치 무언의 참선에 들어간 듯.


비가 그친 후 짙게 깔린 연무가 산사를 덮고 있었다. 방문 날 빗방울이 간간히 드는 흐리고 후덥한 날씨임에도 산사의 기운은 선선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사찰은 차분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고성 화암사는 금강산 최남단에 있는 강원도 사찰이다. 금강산은 북녘땅인데 산역이 커서 남녘땅까지 이어진 걸까. 사찰 이름을 ‘금강산화암사’라 부르는 걸 보니 우리 쪽 강원도 일부도 금강산 자락에 속하나 보다.

화암사는 금강산 1만 2천 봉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첫봉 신성봉에 세워진 첫 암자라고 한다.

신라 후기 참회 불교를 정착시킨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사찰로 진입하는 돌다리에서 경내를 바라보니 모든 사심을 버리고 발길을 들이라는 듯이 정갈하고 엄숙하다. 사심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이 아니겠는가. 오욕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파생되고 칠정이 정제되지 못하면 번뇌로 갈등하게 된다.


오욕 칠정을 추스릴 수 있으면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인간 속세 생활에서 오욕칠정은 인간들의 삶과 뗄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며 번뇌와 고뇌의 원인이 된다.

오욕은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이고, 7정은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喜怒哀樂愛惡欲)을 말한다.


오욕의 욕망들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우리의 재물욕은 끝이 없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면 만사가 형통인 풍조이다 보니 물질을 축적하려는 욕망이 한없이 커진다. 과잉 생산 사회에서 과소유와 과소비에 집착하는 과욕의 시대이다. ‘소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물질은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지만 물질을 축적하는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필요한 만큼만 가지면 모자람이 없다. 미니멀리즘의 실천은 더욱 마음의 풍요를 가져올 수 있다.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면 생활이 단순해지고 생각도 정리된다. 외적인 소유 욕망을 줄일수록 삶의 내면은 간결해지고 풍요로워진다.


더욱이 재물욕을 벗어난다는 것은 재물을 적게 소유한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아예 물질을 수단의 개념으로 인식해야 한다. 재물에 종속되지 않고 재물을 지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많은 물질을 가졌더라도 재물을 선의로 이용한다면 재물욕에 매몰되지 않은 것이다.

명예욕도 집착 욕망에서 나온다. 명예를 얻겠다는 욕망과 집착은 스스로를 다그치고 힘겹게 한다. 오히려 명예는 능동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보상 격으로 사후에 부여되는 수동적인 특성을 갖는다.


훌륭한 위인은 모범적인 생애를 살았기에 명예가 주어지는 것이다. 명예를 얻기 위해, 위인이 되기 위해 숭고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올곧고 성실하게 살아 간 삶의 궤적이 훌륭했기에 위대하고 명예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삶이 후대에 귀감이 되는 명예로운 삶으로 칭송된다.

식욕은 일종의 식탐이다. 많이 움켜쥐려는 집착이 음식물을 먹는 과정에 과잉 섭취로 표출된다. 소식이 몸에 좋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적절한 음식양이 위에 부담을 주지 않고 소화도 원활하다. ‘지나치면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격언이 여기에 딱 어울린다.


색욕은 무분별한 욕정이다. 인간의 성욕은 선천적인 욕구이다. 인간이 가진 성적인 욕망 그 자체가 불온할 수는 없다. 단 색욕은 방만하고 절제 없이 무분별하게 성적인 욕망에 도취되는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색욕은 왜곡된 성적 욕망이고 무질서한 성적 방종이며 절제되지 않는 성적 탐닉이다.


칠정은 인간사의 희로애락으로 가늠할 수 있다. 모든 감정은 변한다. 집착하면 괴로움이 된다. 특정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명상과 관조를 통해 자유로움을 찾아야 한다.


산사에 들어서면 짐짓 경건해져 방금 전 속세에서의 행태들이 절 경내의 엄숙함과 경건함에 압도된다. 속세의 때를 벗듯 스스로를 잠시 되돌아본다. 산사의 가르침에 견주어보면 조금 전 속세에서의 처신들은 순간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아옹다옹 돈을 벌려는 욕망도 산사에서의 가르침인 물욕을 버리라는 교시 앞에 움칫해진다. 큰 재산도 언젠가는 나의 손아귀에서 사라지는 헛되고 의미 없는 욕망일 뿐이다. 우리들이 아귀다툼으로 추구해왔던 속세의 행복의 조건들도 산사의 고요함 속에서 모두 물거품이 된다. 경전을 읽는 울림에 묻혀 한갓 부질없는 욕망이 될 뿐이다.

채워져 있는 곳간을 비워야 한다. 욕망을 비우고, 애착을 버려야 한다. 공(空)으로 돌아가야 허심탄회한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


공은 빈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채움을 준비하고 내실을 기약한다. 비워있기 때문에 그만큼 채울 공간이 많다. 속이 차 있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비워야 신선한 가치를, 새로운 신념을, 참신한 비전을 들여올 수 있다. 기존 생각에 매여있으면 구태의연해진다. 기득권적 욕망에 갇혀있으면 진부해질 뿐 새로운 출구를 모색할 수 없다. 보신주의와 아집주의에 매몰될 뿐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기득권의 비애는 이처럼 처량하다.


산사에 들어서는 순간 속세의 잡념을 잠시나마 벗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산사의 고요한 운치에, 산중 절의 잔잔한 풍경에, 속세와 단절된 산속 절의 단아한 정경에 오롯이 빠져들고 싶다. 물론 산사를 벗어나자마자 속세의 온갖 상념들이 순식간에 엄습해오겠지만. 잠시 가라앉았던 탐욕과 집착이 언제 그랬느냐 듯이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시 단단히 휘잡아 버리겠지만.

촉촉하게 젖은 안개가 사방에 자욱한 데

고요한 산사는 말이 없다.

무언(無言) 속에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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