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의 바다 내음은 푸근하다. 때때로 어떤 이들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추억 여행을 가는 곳이다.
동쪽의 끝 바다라 해서 붙여진 정동진은 마음의 고향처럼 우울할 때 나를 끌어당기는 곳이다.
강릉시에 속하지만 시가지로 떨어져 혼잡스럽지 않고 차분한 곳이다. 작은 마을 앞자락에 있는 바다 풍경은 조용하고 한적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달랜다. ‘궁궐(경복궁)이 있는 한양에서 정동쪽에 있는 바닷가’라는 뜻에서 정동진이라 불렀다.
정 동쪽의 끝 바닷가 정동진에서 착상을 얻어 국토의 서쪽 끝을 정서진, 남쪽 끝을 정남진이라 명명하는 지역을 구상하여 관광사업을 활성화하려는 지자체도 있다.
정동진 역은 세계에서 가장 바닷가와 가까운 역이다. 정동진 바다 하면 정동진 역이 곧이어 연상된다. 둘은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뗄 수 없는 일체이다.
사람들은 정동진 야간열차를 타고 동해 바다를 보러 가곤 했다. 밤 열차를 타고 새벽 바닷가에 도착해 감성을 만끽하려는 낭만주의자들의 여정으로서 정동진은 제격이었다. 정동진은 아주 오래전부터 낭만주의 여행자들에게 낭만 해변의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마음이 허할 때도 사람들은 정동진을 찾았다. 애인과 이별한 사람은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려, 열애하는 연인끼리는 낭만 데이트를 한껏 즐기려, 세파에 지쳐 마음이 무거울 때는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서 정동진을 찾았다.
정동진은 젊은이들에게는 낭만의 해변이고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의 장소이다.
정동진은 한때 정동진역이 교통인구 측면에서 부적합하여 폐역으로 검토된 적이 있을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모래시계’의 배경 촬영장이 되어 급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당시 강릉 외곽의 한적한 바닷가 정동진을 아는 사람은 뜸했다. 이제는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장으로 정동진이 널리 알려져 정동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하나의 계기, 하나의 우연하고도 예측 못한 사건이 정동진의 지역 인지도를 완전히 반전시겼다. 정동진의 갑작스런 변신 과정은 일확천금이자 로또 당첨 격이다.
그러나 실제 그럴까. 속내를 보자. 오히려 유명하기 전 그 당시 정동진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알려질 만한 정동진의 매력을 이미 지니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끌벅적과는 거리를 둔 한적한 바다 풍경. 바닷가와 근접해 있는 시골역의 존재, 바다를 가까이 접하고 있는 주변 촌락의 소박한 풍경, 길게 펼쳐진 모래 해변을 접한 고요한 바다 풍경, 새벽녘에 위용을 드러내는 강렬한 붉은 해돋이 풍경..
이미 정동진은 다른 유수한 해변과 다른 정동진만의 매력적인 포인트가 있었다. 이런 연유로 드라마의 촬영 최적지로 선정되었던 것이 아닐까. 드라마 전문 감독들과 스탭진들이 별생각 없이 바닷가 한 곳을 지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의 정서와 정동진의 풍경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우리 삶에서도 완전한 우연은 드물다. 우연처럼 보여도 그 내면을 찬찬히 보면 이런 우연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명언이 있지 않는가.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우연히 나에게 다가온 좋은 찬스도 그 호기를 획득할 만반의 준비가 갖춰지지 않으면 나에게 무용지물이 된다. 그 기회는 즉시 나를 떠나 다른 이에게로 간다. 다른 이에게 또 기회를 주기 위해.
정동진이었기 때문에 정동진은 드라마 촬영지로 선택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명세를 획득했다. 우리도 나다운 모습을 갈고닦으면서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나의 정동진이 없다면 내게는 기회가 오기 어렵다. 설령 기회가 온다 해도 기회는 작동할 수 없다. 나의 정동진이 필요한 이유이다.
정동진을 세상을 널리 알린 사건은 모래시계 드라마였다. 1995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로 인기 드라마였다. 시청률이 높아 매회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길거리에 사람들이 뜸했다는 얘깃거리도 있다.
모래시계는 현대사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그 시대를 사는 인간들의 사랑과 욕망, 암투를 리얼하게 묘사한 드라마이다. 시대 배경으로 유신 말기의 상황과 광주 민주화 운동이 고스란히 등장하는 등 스캐일이 큰 드라마였다. 일반인들이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던 당시 역사적인 사건들을 드라마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현대사 지식에 목 말라하던 시청자들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한 격이어서 시청률이 꽤나 높았다.
정동진은 드라마 촬영지로서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 정동진 역 구내에는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한 드라마 포스터가 예쁜 액자 형태로 역 외벽에 가지런히 붙어있다. 모래시계(1995)를 비롯해 베토벤 바이러스(2008), 푸른 바다의 전설(2017), 남자친구(2019) 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정동진에는 모래시계 조형물이 있다. 정동진 모래시계는 드라마 모래시계 영향을 받아 제작한 상징성도 있을 것 같다. 모래시계는 실제 작동하는 시계는 아니다. 시간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모래시계 모형은 위 공간과 아래 공간이 있고 이 사이를 통과하는 좁은 통로가 있다. 위에 있던 모래가 조금씩 좁은 통로를 통해 아래로 모두 내려가면 일정한 시간 단위가 흐른 것이다.
정동진의 모래시계는 위의 공간을 미래 시간으로, 아래 공간을 과거의 시간으로, 모래가 흐르는 통로는 현재를 뜻하고 있다. 위쪽 공간의 모래(시간)가 통로(현재)를 통과하면 아래 공간(과거)에 쌓인다. 미래의 시간이 현재를 거쳐 끊임없이 과거로 흐른다. 미래는 조만간 현재가 되고 현재를 스쳐가는 시간들은 즉각 과거로 쌓여간다.
시간은 멈춤이 없다. 두 번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순간들이다. 사람이 접촉하고 만나고 인연을 맺는 순간은 유일한 한 번의 계기이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는다. 두 번 만남이 있다 손 치더라도 두 번째의 만남의 상황은 첫 번째와는 결코 같지 않다. 때와 장소, 사람, 상황은 늘 변화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일회성(一回性)은 이처럼 엄숙하고 소중하다. 미래의 모습은 현재의 처신의 결과로 형성된다. 미래는 곧 현재와 뗄 수 없는 강한 인연을 맺고 있다.
모래시계에서 시간의 소중한 상징성을 읽은 때문일까. 새해 벽두에는 정동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정동진은 해맞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동해안의 가장 동쪽 위치라는 지리적 상징성까지 더해져서 1월 1일 새벽 벽두부터 해돋이를 보려고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먼 곳에서 밤 열차를 타고 정동진역에 도착하려는 사람도 많아 새해 전날 열차 예매를 시작하면 눈 깜짝할 사이 예매 마감이 되곤 한다.
사람들은 해돋이를 보기 위해 정동진에 가야 한다. 그곳에서 한해 바램과 소원 성취를 빌어야 하는 것이다. 하릴없이 또 한 해가 지는 해를 후회스럽게 떠나보낼지라도 새해에는 새 희망을 품고 소망을 안고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했다.
가끔 문득 호기심 어린 궁금증이 든다. 많은 인파 속의 개인들은 어떤 소원을 빌까. 무엇을 염원할까. 저마다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처지가 달라 각양각색의 바램들이 있을 텐데 무얼까. 남에게 털어놓지 못할 맘속에 고이 숨겨둔 바램들이 한 가지씩은 다들 있겠지.
정동진역에는 정동진을 마치 숭고한 마음의 교항곡처럼 칭송하고, 세파에 지친 피곤한 몸을 평안하게 감싸는 안식처로 예찬하는 시비들이 있다. 마치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 듯..
<정동진> /신봉승
벗이여/
바른동쪽/정동진으로
떠오르는 저 우람한/아침 해를 보았는가
...
벗이여
밝은 나루/정동진으로
밀려오는 저 푸른 파도가
억겁을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가
...
<정동진> /원영욱
나는 가야해
모든 것을 팽개치고
너마저 지우개를 지우고서
...
이곳은 따스한 어머니의 품안
잊지못할 업보의 휴식처
모두들 맘속에 그리운 곳 하나쯤은 있다. 인생살이가 고단할 때 기대고 싶은 장소가 한 곳쯤은 있어야 한다. 주변 모든 것들이 낯설고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될 때 포근히 기댈 한 곳은 꼭 있을만하다. 내 마음이 홀대받지 않고 이유 없이 공감해 줄 쉼터 한 곳은 꼬옥 맘속에 간직해 두어야 한다. 비밀스러운 자신만의 정동진을 하나쯤 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