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익히 아는 독립 운동가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과 사회 혁명을 위해 한 몸을 불사른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였다.
부산에서 박차정 의사(義士)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있다. 그녀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5년 생가를 복원했다. 개발로 숱하게 역사의 흔적이나 자취가 사라져 가는 마당에 이 같은 유적지 보존은 바람직하다.
그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지역 역사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해당 마을의 자부심이 될 수도 있고 자라나는 후대들에게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장이 될 수 있다.
박차정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일색이었다. 아버지는 일제 침탈에 항거해 자결했고 그의 친오빠 박문희, 박문호도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유공자였다. 슬프게도 저항과 투쟁에 몸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비참하게 생이 마감되면서 단명으로 끝난다. 이로 인해 순조로이 집안의 대가 이어지지 않아 후손들이 끊기거나 자손들의 수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경우가 있다. ‘친일 행각은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은 3대가 망한다’는 씁쓰레한 우스개 소리가 헛말로 들리지 않는다.
박차정은 의열단원이었다. 박차정의 남편이 의열단을 조직했던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무장 투쟁으로 결연히 맞선 선봉 독립 운동가였다.
해방 후 조국 땅에 돌아온 김원봉은 사회주의 진영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탄압을 받는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그는 월북했다. 북한에서 내각 노동상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월북한 김원봉이 남편이라 그런지 몰라도 박차정은 그동안 독립 유공자로 인정되지 않다가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 이르러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을 수 있었다.
최근에도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추서 여부를 두고 우리 사회 내부 갈등이 또 한 번 심하게 요동쳤다. 혁혁한 독립 투쟁의 공로를 인정하자는 측과 해방 후 월북해서 북한 정권에 복무한 이적성을 강조하는 측 간의 입장이 이념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안타깝게도 독립운동의 공로 인정 과정에도 이념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은 민족적인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이원화되어 전개되었다. 해방 후 좌우 냉전 체제는 독립운동가의 선별 포상에도 강하게 작용했다. 특히 좌우 갈등은 6.25 전쟁으로 인해 증폭되면서 이념 대립이 극에 달해 독립운동도 어느 진영에서 했느냐가 크게 문제시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남북한 대립은 한국 보훈 행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념 포용력이 아직까지도 넓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깊지 않은 듯하다. 평화 통일이 되면 독립운동사도 새롭게 재조명되려나.
박차정은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칠산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서 출생했다. 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신간회 자매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신간회는 민족의 정치 경제적인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단체이다. 근우회는 이러한 신간회의 여성 활동 단체였다. 근우회는 민족의 독립운동과 더불어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고 오히려 관습적 차별은 법제화되어 시행되었다. 남성 중심의 호주제에 기반하여 여성의 재산 소유권과 처분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재산 상속과 친권 행사 등에서도 남녀 차별은 엄연했다. 노동 현장에서 여성의 임금은 남성 임금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근우회 행동 강령 첫 번째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인 일체 차별 철폐였다. 여성 혁명가는 피식민지 국민으로서 당하는 탄압과 남존여비의 차별 제도로 인한 여성 차별의 이중적인 족쇄를 끊어야 했다. 박차정은 조국 독립과 여성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 혁명적인 여성이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원이 되었다. 김원봉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지원 단체인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 단장으로 무장 투쟁에도 관여하였다.
박차정은 중국 곤륜산 항일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여러 후유증이 겹쳐 1944년 해방을 한해 앞두고 34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해방 후 김원봉은 충칭 회상산에 안장되어 있던 부인의 묘를 이장하여 밀양 자신의 고향 땅에 묻었다. 사후에서라도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 독립의 땅에 묻혀 영원한 안식을 얻어야 했기에.
여담으로 밀양에 있는 박차정 묘지는 잔디를 애써 조성하고 가꾸어도 잘 자라지 않아 황량했다고 한다. 우국지사는 저승에 가서까지도 통일된 조국 독립을 이루지 못한 여한을 품고 있는 것인가. 공동묘지 한켠에 조성된 소박한 묘지는 불꽃같은 생을 살다 간 한 여성 혁명가의 자취를 드리우고 있다. 학교 동창생들이 방문하여 묘터 잡풀을 베고 무덤을 돌보곤 했다.
이 같은 희생의 공덕은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부채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이유이다. 역사 공동체, 사회 공동체는 늘 관심 어린 눈길, 애정 어린 손길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