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세월들은 이바구가 되고

부산 초량 이바구길

by 갈잎의노래


부산역에서 내리면 부산 동구이다.

부산역을 마주하고 있는 동구는 부산의 근현대 역사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동구 부산역 앞 언덕길에는 산복마을로 이어지는 초량 이바구길이 있다. 이바구란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바구길은 우리 윗대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절절히 증언하고 있다. 이 길을 걷노라면 지나온 세월만큼 굴곡진 산복마을의 삶의 드라마를 엿볼 수 있다.


초량 이바구길은 부산 동구 지역이 걸어온 근현대사를 이바구한다. 우선 이 길을 나서면 남선 창고와 백제병원과 같은 근대 건축물 탐방을 통해 동구의 근대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지금은 건물이 철거되고 허물어져 한켵 담벼락만 남아있어 온전한 형체를 볼 수는 없지만 남선 창고는 부산 최초의 창고였다. 함경도 물건을 가져왔다해서 북선 창고, 해산물인 명태를 주로 보관했기에 명태 고방으로 불렸다. 창고 물품은 전국 곳곳에 공급되면서 부산의 물류 보급 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구)백제병원은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이었다. 부산 근대 건축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건물 용도 변경에 따라 부분 개보수는 이루어졌으나 그나마 최초의 형태가 잘 보전되어 있다. 이 건물은 산전수전 세월 따라 많은 부침을 겪었다. 중국 음식점, 옛 일본군 장교 숙소, 중화민국 임시대사관, 예식장 등으로 얼굴을 갈아탔다. 지금은 1층을 전면 리모델링하여 카페로 운영하고 옆 건물 층에는 창비 문학관이 운영되고 있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느긋이 음미하면 지나간 세월의 자취가 새겨진 중후한 건축 구조물에서 품어져 나오는 근대의 여운을 감지할 수 있다. 세련되고 깔끔한 현대식 카페에서 느끼는 분위기와는 결이 다른 묵직한 역사의 뒤안길이 서서히 눈 앞으로 다가온다.



비탈길 초입에 접어들면 담장 갤러리가 나타난다. 동구의 역사를 간략하게 사진과 그림 이야기로 꾸몄다. 낡고 빛바랜 흑백 사진들이 가난하고 모질던 시절 끈질기게 살아왔던 주민들의 치열한 삶을 실토한다.



빛바랜 사진 한 장에 발길이 멈추고 오랫동안 시선이 머문다. 집 수도나 물탱크도 없던 시절 공동우물터에 주민들이 물을 긷기 위해 길게 줄지어선 사진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공동수돗 시설에서 물 한 동이를 받을 수 있을까. 얼마큼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 물로 하루치 식수로, 밥물, 생활 용수로 사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애쓰러운 모습에서 가난한 시절에 고단했을 그들의 삶을 직감한다. 물동이에 물을 담고 나면 끝이 아니다. 아니 이제부터 다시 힘겨움의 시작이다. 이들은 무게가 만만치 않을 물동이를 매고 가파란 언덕 비탈길을 올라가야만 한다.


산복마을 사람들은 거의 매일 아랫동네 식수원에서 양동이에 물을 길어 가파른 언덕 위 집으로 날라야 했다. 힘겨운 물동이를 지고 윗대 주민들은 평생 동안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을까. 거기에다 추운 겨울에 눈이라도 내린다든지 혹한의 동절기에 계단 곳곳이 얼어붙는다면 어찌 됐을까. 거의 엉금엉금 기는 식으로 오르고 내리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가파른 언덕길 계단 옆에 모노레일이 설치되었지만 이전까지 오랫동안 계단만이 산복 위의 집과 아래 마을을 오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초량 이바구길에 있는 이 계단은 168칸이라 168계단이라 부른다. 올라보았다. 맨몸으로 한 번에 168계단을 올라가기도 힘이 부치고 숨이 차다. 이 비탈 계단길을 무거운 물동이, 생활 짐을 메고 수없이 오르내렸을 옛 시절 부모님들의 생활력이 경이롭고 마음이 먹먹하다. 168계단은 산복마을의 고단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동구 관광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옛사람들의 힘겨운 삶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풍경이 되었다.



부산 초량 이바구길에 오면 반드시 걸어서 168계단을 올라가 보아야 한다.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오르면서 힘들고 숨이 가쁜 걸 흠뻑 체험해야 한다. 나아가 산복마을의 속살을 들여다보려면 산복마을 곳곳의 굴곡진 골목길을 오르락내리락 걸어보아야 한다. 손쉽게 차편으로 마을 위를 올라와 전망만 관망하면 산복마을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초량 이바구길은 동구 출신이거나 동구에서 활동한 명사들을 핫플레이스나 기념관으로 조성하여 소개하고 있다. 168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김민부 전망대가 있다. 김민부 전망대서 동구 출신 시인 김민부를 한번 회상하게끔 한다. 김민부 시인 이름은 몰라도 가곡 가사로 채용된 ‘기다리는 마음’의 시는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


전망이 뛰어나 여기에서는 영도다리, 용두산공원, 부산 신항까지 조망할 수 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김민부 전망대에서 눈앞에 확 트인 부산 전경을 보며 시인의 시를 곱씹어보면 그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의 감동이 잔잔이 밀려올 것 같다.


이바구길 관광길에는 장기려 박사의 기념관도 방문해 볼 수 있다. 장기려 박사는 오랫동안 동구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펼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다.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으로 따뜻한 의술로서 사회적 역할을 몸소 실천한 분이다. 낙후되고 가난한 동구에서 의료를 매개로 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했다.


이바구길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산 중턱에 놓인 산복도로를 만난다. 이 산복도로 노선을 망양로라 한다. 산복도로를 걷다 보면 산복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산복도로 전시관’을 만날 수 있다. 전시관은 산복마을이 어떻게 조성되었고 오늘날까지 어떻게 변천되었는가를 알려준다. 다양한 사진과 모형, 디지털 이미지로 산복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다각도로 조명해준다.


펼쳐진 부산 전경을 보며 산복도로를 느긋하게 걷다 보면 길 옆에 확 트인 전망대가 나온다. 여기에는 시인 유치환의 빨간색 우체통이 있다. 느린 우체통이다. 사연을 적으면 1년 후쯤에야 수신인에게 도착한다. 전망대 아래 시인의 방에는 편지지와 우표를 판매한다. 그리운 이에게 정다운 사연의 편지를 쓸 수 있다.



쓴 편지를 느린 유치환 우체통에 넣으면 1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리운 사람의 손에 닿는다. 지금의 사연이 1년 후에는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다. 순간 전송 중심의 디지컬 단문이 대세인 요즈음 아날로그적인 손 편지 장문 글이 어떤 감동을 불어올지 자못 흥미롭다.


시인은 <행복>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맘을 토로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



2.6km 초량 이바구길.

짧지만 이 길은 앞선 우리 이웃들의 축약된 삶의 파노라마 길이다.

우여곡절진 인생 토막토막마다 애절한 사연이 배어 있는 애틋한 길이다.

마침내 고달팠던 지나온 세월들의 기억들이 아련한 추억의 이바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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