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감성에 젖는 역사

목포 근대역사문화거리

by 갈잎의노래


목포의 근대역사거리를 걸어보자.

순간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언뜻 스치면서

마치 근대 개항기 목포 도시 분위기에 흠뻑 빠진다. 역사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감한다.


근대 개항 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조성한 근대거리에는 일본식 건축물들이 많다. 길 양쪽으로 군데군데 위치해 역사의 향수를 은은히 풍기고 있다. 근대역사거리를 찬찬히 음미하면서 걷으면 그 시절의 역사 내음을 맡을 수 있다


목포는 부산, 군산, 인천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4번째 개항한 항구 도시이다. 목포는 고종의 칙령에 따라 자주적인 개항을 하게 되는 데 고종은 개항으로 관세 수입을 늘려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자 했다.

개항 이후 목포는 6대 도시로서 성장하게 되며 특히 목포에는 쌀, 소금, 면화 이른바 삼백 산업이 발전된 관계로 역설적으로 일본에겐 매력적인 수탈 대상 도시가 된다.



현재 목포에는 근대역사를 대변하는 주요 건축물들이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1897년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이 밀려 들어온 목포에 세워졌던 건축물들은 1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외형은 낡았지만 골격은 선명히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인 거주 지역은 상업과 경제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기에 금융기관, 상업시설, 행정시설들이 많이 들어섰다. 대표적으로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구 목포화신연쇄점, 해안로 붉은 벽돌 창고, 일본식 상가 주택 등은 외형이 잘 보전되었다.

구 호남은행 목포 지점
구 목포화신연쇄점
해안가 붉은 벽돌 창고

이외에 일본인들이 다녔던 학교와 교회, 사찰, 일본식 민가들도 원형이 크게 변형되지 않은 채 근대역사거리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근대 건축물들은 방문자들에게 근대역사거리를 실감 나게 느끼도록 한다.



원형이 잘 보존된 몇몇 건축물들은 건축학적인 구조물로써 뿐만 아니라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뛰어나다. 개항 후 행정 통치를 위해 설치된 구 일본 영사관을 비롯하여 조선인에 대한 경제 수탈의 첨병 역할을 했던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 지점, 일본인 사찰 분원인 동본원사 등은 근대건축물로서의 의미가 적지 않다.

현재 목포 근대역사관 1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일본영사관은 1900년에 조성되었다. 구 일본영사관은 일제의 경제 침탈과 식민지 지방행정 통치의 핵심 업무를 맡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목포부청으로 행정지명이 변경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 건물은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 등 여러 용도로 변경되면서 활용되었다.


구 일본 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현재 목포 근대역사관 2관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인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일본인들의 이주와 정착, 사업상의 경제적 이익에 복무하는 경제 정책을 펼친 일본의 특수 국책은행이었다.


호남지방에서 초기에는 1909년 나주 영산포에 지점이 설립되었다가 목포로 이전하여 1921년에 신축 완공한 건물이다. 전반적인 건물 외형은 모래와 시멘트를 혼합한 석판 모양으로 시공하여 마치 석조건물처럼 보인다. 이 건물은 역사적으로 일제가 조선에 대한 경제적인 수탈을 주도했던 상징성을 갖고 있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 지점

동본원사는 도쿄에 본원이 있는 일본인 사찰 동본원사 목포 별원 법당으로 지워졌다. 드물게 석재로 일본 목조 불당의 건축양식을 표현한 특이한 건축물이다.


본당은 석조 단층 건물인 데 벽채는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암을 이용했으며 지붕틀은 국내산 목재들을 사용하여 제작했다. 석재 벽을 바탕으로 높고 가파르게 치솟은 기와지붕 구조는 단층임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면모를 드러낸다.


재미있게도 이 불교 사찰이 해방 후에는 한때 교회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1987년 6.10 민주 항쟁 당시 민주화 운동의 치열한 현장이자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현재는 공연, 전시를 하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본원사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상기하는 장소이자 이곳에서 개화기, 근대화를 거치면서 끈질기게 삶을 이어온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든 터전이었다. 차별과 억압의 공간이자 저항과 희망의 공간이었다.


목포에는 이곳에 진출해 온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생활하는 거주지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지금 구도심의 중심 오거리 주변에 일본인 거류 지역이 계획적으로 형성되었다. 반면 조선인은 목원동 방면의 북촌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바닷가를 접한 오늘날 만호동 주변의 지역을 남촌이라 불렀다. 이곳에는 다양한 상업시설과 도시 편의 시설이 들어서 번화한 거리를 이루었지만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목원동 방면의 북촌 지역은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토민 들은 이주민들에게 차별받으며 열악한 도시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다.



오늘날 도시의 공간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차별 실체를 또렷이 알 수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각기 거주했던 집단 주거지역이 차별적으로 이원화된 공간적 특성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개항지로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은 도로망이 사방으로 반듯하게 구획되었다. 반면에 대다수 조선인들이 살았던 집단 거주 지역의 도로와 골목길은 좁을 뿐만 아니라 굽어지고 불규칙적이다. 도시 확충에 따른 계획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옛 지형 그대로를 답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선일체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체제를 근간으로 삼았던 일제 통치의 허구성이 여실이 드러나는 역사의 진실을 엿볼 수 있다.

구 목포구립병원 관사. 현재 카페로 전용된 내부

현재 목포시는 근대 건축물이 보존되어있는 이 공간을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모토 아래 근대의 역사와 문화가 생동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 거리를 관광 자원화하여 방문객들이 근대역사거리를 걸으면서 레트로 감성에 젖기를 기대한다. 그리곤 과거로의 향수를 떠올리며 한 시대 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책으로 접하는 사유 속의 역사가 아니라 몸으로 체감하는 역사의 공간을 희망한다. 우리 시야에 우뚝 선 역사의 실체를 마주하며 역사와 맞닥뜨리기를 내심 의도한다. 역설적이게도 목포의 늦은 구도심 개발이 도시 내의 많은 근대 역사 건축물들의 손상을 막고 살렸다는 점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목포의 근대역사거리의 의의는 분명하다. 윗세대들에게는 우리 근대사를 복고풍 감정으로 회고해 볼 수 있는 장소로, 후세대들에게는 근대사를 생동감 있게 체험해 볼 수 있는 현장으로 자리매김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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