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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잎의노래 May 27. 2024

다리 위의 강태공


낚시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호불호가 극명하다.

낚시 비토론자들은 낚시 애호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낚싯대를 던지고 물끄러미 물만 쳐다보는 신세가 따분하게 보인다. 미끼를 꽂아 물에 던진 낚싯대만 바라보며 마냥 물고기들이 입질하기를 기다린다. 낚시 끝 추의 움직임만 하염없이 주시하며 정적인 자세로 관망한다.


취미 활동으로서 신체의 움직임도 극히 단순하고 수동적이라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낚시는 몸 운동도 아닐뿐더러 짜릿한 스릴감을 맛볼 수 있는 승패를 다투는 오락성도 없다. 그렇다고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는 역동적인 활동도 아니다. 그저 정적인 형태이고 마냥 심심한 놀음이다. 낚시를 비토하는 사람들의 낚시 평은 장단점 분석이 아니라 혹평 그 자체이다.

     


반면에 낚시 예찬론자들은 취미 생활로서 낚시에 대한 평가가 후하다. 낚시는 정적 활동이지만 마음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다. 복잡 다난한 생활 리듬에서 벗어나 평온한 심적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비록 고기를 낚지만 그 과정에 빈마음으로 자연과 교감한다.

그래서 과거부터 선비들은 낚시를 정신 수양의 한 방편으로 여겼다. 중앙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권력의 무상을 깨닫고 속세의 탐욕을 멀리하고자 낚시를 즐기곤 했다. 청빈한 삶에 어울리는 낚시는 묵언 속에 마음을 수양하는 일종의 명상 행위였다. 강호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좌식하여 평정심을 도모하기에 낚시만 한 취미 생활이 없다고 호평했다.     


어쨌든 낚시의 호불호를 떠나 이스탄불 갈라타 다리 위의 낚시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물론 동양화에 등장하는 강이나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운 한적한 낚시의 형태는 아니다.

다리 위를 따라 빼곡히 자리한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다리 아래 바다 쪽에 던지고 바다낚시를 하고 있다. 다리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빈틈없이 들어찬 낚시꾼들의 낚시 모습은 이스탄불 관광의 진풍경이다.   

   


강태공들은 마치 그 일이 취미가 아니라 주업인 듯 온종일 열중한다. 취미로 몇 마리 낚았으려니 생각하며 호기심에 슬쩍 낚시꾼 옆에 놓여있는 낚시통을 들여다본다. 웬걸 통을 그득 채운 적잖게 물고기를 잡은 사람도 제법 많다.      


여태 못 보던 재미있는 풍경이라 갈라타 다리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천천히 걸어가 본다, 다리  전 난간에 빽빽이 올려 논 낚싯대의 행렬은 군대 총사열처럼 일목요연하다. 낚싯대 사이에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강태공들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 입질을 기다린다. 낚싯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빛이 평온하다.     

낚싯대 앞에 서있는 강태공들의 긴 열병식 같은 도열은 이스탄불 갈라타 다리에서만 볼 수 있는 명장면이다. 관광객들은 호기심 가득 찬 표정으로 이 광경을 본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기에,   

  

다리 위 낚시꾼의 풍경은 도시를 한층 여유롭게 한다. 소일하는 강태공들의 모습은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일상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린다. 긴장의 연속이기 쉬운 도시민에게 느긋함을 선사한다. 삭막한 도시의 풍경을 이완하면서 도심 속에 낭만을 한껏 부추기는 촉매제가 된다.



더불어 다리 위의 낚시꾼들은 한가로이 시간을 흘러보내며 느림의 가치를 만끽하고 있다. 생활 속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여백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우리는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익숙하다.

일상에 늘 부과되는 과업들을 성취하기 위해 시간에 쫓긴다. 긴박한 생활 리듬에 허덕이며 아바둥 살아간다. 심신이 지친 이들에게 갈라타 다리의 강태공들의 자태는 생활 속에 신선한 자극제가 된다.  

   

진기한 낚시 풍경이 연출되는 갈라타 다리는 독특한 이층 구조로 만들어졌다. 차량과 행인들의 이동로인 이층 상판이 있고 교량 아래 일층 통행로가 있다. 일층 통행로에는 음식점과 카페들이 줄지어 다리에 입점해 있다. 다리 전체에 걸쳐 조그만 요식 타운이 성되었다.     



다리 설계자의 발상이 참신하다. 윗다리에서 낚시를 즐기듯 아랫다리에서 소박한 유흥을 즐길 수 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음식점에서 식도락을 즐길 수 있다. 다리 양쪽으로 펼쳐진 멋스러운 보스포루스 해협 바다 풍경을 감상하면서.      


다리 위와 아래의 이 모든 움직임들의 집합체가 갈라타 다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총체적인 모습들이다. 갈라타 다리는 그 자체로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한 관광 스폿이 되었다.     

낚시의 대열을 구경하면서 걷다 보면 저절로 낚시꾼들의 고기통에 눈길이 간다. 눈요기로 낚시꾼들의 낚시 어획량을 슬쩍 곁눈질로 본다.    

  


서로 옆으로 다닥다닥 자리 잡은 낚시꾼들의 조업양은 각양각색이다. 알게 모르게 수확량이 비교될 수도 있어 직설적으로 고기통을 바라보기는 미안스럽다. 보는 듯 안보는 듯 스쳐 가듯 보아야 한다. 말 그대로 은근슬쩍이다. 적은 어획량을 낚은 강태공의 자존심에 손상을 끼쳐서는 안 된다. 여유로움의 향연 장소인 이곳에서도 조촐한 고기통 주인에게는 속절없는 연민이 살짝 들기도 한다.     


여기에도 어획량의 빈부격차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어획량의 많고 적음에 방점을 두는 이가 있다면 낚시 본연의 여유로움과 자족을 잃어버릴 수 있다. 본연의 목적인 여유로움의 가치를 저버리고 물고기 포획 수의 놀음에 은연중 집착한다면 마음은 강박해진다. 심신의 회포를 푸는 여가 선용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잉태하는 업으로 변신한다.     


갈라타 다리 낚시는 어획 양이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 낚시 그 자체에서 느끼는 행복이 우선이어야 한다. 물질의 논리를 탈피하면 이곳의 소일거리는 무릉도원의 희락이 된다.      


우리는 본말전도를 쉽게 일삼는다. 건강 도모를 위해 시작한 운동이 긴장으로 팽배한 승부욕으로 치닫고, 소일거리로 재미 삼아 벌인 일에 과도하게 집착하곤 한다.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수단화된다. 아름다운 삶은 본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제 자리를 제대로 고수하는 데에서 피어오를 지 모른다.   

  


골든혼에 자리 잡은 갈라타 다리 낚시 풍경은 본연에 충실한 듯 보인다.

강태공들은 누구 하나 물고기의 수에 연연하는 것 같지 않다. 푸근한 표정의 얼굴들은 오가는 관광객들의 시선에 괘념치 않는다. 담담히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싯대 끝 추에 무상의 눈길을 줄 뿐이다. 낚시꾼들의 정적인 풍경과 다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동적 풍경이 겹쳐져 갈라타 다리는 묘한 역설의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이제 이스탄불 관광에서 갈라타 다리를 뺄 수 없다.

지리적 풍광을 넘어 갈라타 다리는 제 갈길에 바쁜 현대인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펼쳐 보이고 있다.

속도전에 내몰린 우리들에게 유유자적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심오한 생의 이념은 모스크에서만 있는게 아니다.

바닷길을 잇는 한낱 교량인 갈라타 다리도 묵중한 삶의 철학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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