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며 저항하다. 저항하며 사랑하다.

사랑과 저항의 유서/죠반니 삘레리.삐에로 알벳찌 엮음

by 갈잎의노래

이 책은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들의 유서 모음집이다. 사형 집행 직전에 써내려 간 고백들이다.

이들은 저항 운동 과정에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어 만신창이 몸이 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사형 집행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저항하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3세 학생, 21세 기계공, 19세 농민, 34세 대학 강사, 23세 군인, 28세 미용사...


동일하게 점철된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었기에 이 유서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일제의 억압에 투쟁하고, 독재의 탄압에 저항했던 투사들의 끈질긴 항쟁 그리고 크나큰 희생이 너무나 닮았기에.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31일 첫 번째 고문을 받았다. 눈썹과 속눈썹을 뽑힌 것도 그때였다. 1일 두 번째의 고문, 사지의 손톱과 발톱이 뽑혀나갔다. ...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 자신이 어떠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재차 무서운 감방에 처넣어졌을 때, 나는 무릎을 꿇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내손에는 당신의 사진이 꼭 쥐어져 있었다.”<본문 중>


20211118_160845.jpg


유서는 한 인간의 최후의 정리된 생각이자 감정이다. 거기에는 엄숙하고 진실된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형 집행 전 유서를 통해 레지스탕스들은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척, 지인들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그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남겨진 자들에게 무엇을 얘기하고자 했을까.


저항 운동가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학생, 노동자, 교원, 군인, 기술자, 사무원, 성직자, 의사, 상인.. 그들은 왜 저항했을까. 답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유서의 맥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사랑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역사에 대한 사랑.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억압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기 위한 사랑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내가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루이자! 알고 있소? 나의 이상에는 당신과 지제트라에 대한 사랑과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융합되어 있다는 것을. <본문 중>


이들의 저항은 고귀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투신했기에 죽음 앞에서도 이들의 심정은 차분했고 품위는 당당했다. 인간적인 고뇌를 순교자적인 생애에 온전히 용해시킨 듯.


“사랑하는 안나

당신이 나를 위해 애써 준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소. 나는 용기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언제까지라도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요. 잘 있으시오. ... 형 집행의 순간까지도 그것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죽어야만 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본문 중>


20211124_214502.jpg


오히려 온갖 상념으로 착잡했을 자신의 속내음을 결코 들춰내지 않는다. 남은 이들에 대한 위로와 염려만이 최우선 관심사이다. 남겨진 자에게 건네는 마지막 안녕 인사에는 끈끈한 사랑이 점철되어 있다. 무명 전사들의 두서없는 진실한 고백에서 애절한 숭고함마저 느낀다.


“내일 새벽, 묶인 채 총살대 앞에 서서 순교의 즐거움에 얼굴을 빛내면서 ‘쏴’하는 호령을 기다리는 동안, 만약 슬픔의 그림자가 저의 뇌리를 스친다고 하면, 그것은 23세로 생명을 끝마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가슴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저의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모든 이가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


매킨타이어는 개인은 공동체와 분리된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공동체에 소속되고, 성장하면서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의 영향을 받으며,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사회적 역할을 요구받는다.


레지스탕스들의 투신도 조국이라는 공동체, 이 땅의 뭇사람들의 생명과 모든 이들의 태양과, 우리들의 자유를 위해서였다. 후대에게 행복한 터전이 될 공간과 자연과 체제를 위해서 망설임 없이 나섰다.


“만약 여러분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이 같은 아름다운 이탈리아를, 따스한 태양의 축복을 받고 있으며 선량한 어머니와 사랑스런 소녀들이 살고 있는 이탈리아를 지금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임무입니다.”<본문 중>


...생명도, 공기도, 빛도, 태양도, 싸움에 승리한 기쁨도 그리고 이겨서 획득한 자유의 기쁨도,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행복하게 되십시오....<본문 중>


20211104_100239.jpg


헤겔의 역사 발전 법칙이 떠오른다. 도도한 정반합(正反合)의 역사 흐름. 억압과 부정의에는 반드시 반발, 저항이 일어난다. 이러한 대항의 결과로 한걸음 진보한 세상, 합(合)의 역사가 쟁취된다.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세계정신) - 인륜, 계몽, 도덕 - 을 향해 역사는 뚜벅뚜벅 전진해가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단지 하나, 그들이 나를 죽인다고 하여도 역사의 흐름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며,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본문 중>


이들의 투쟁과 희생을 머금은 고귀한 역사는 다음 세대로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제 이들이 남긴 사랑의 유서를 되새기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 되었고, 이들이 두고 간 따스한 인간애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 후대의 의무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제 시간이 다 되었소. 당신을 사랑하오. 이제 당신만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본문 중>

그들은 떠났다. 그러나 떠난 이가 남긴 사랑과 저항의 유서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뜨거우면서도 엄숙하게 언제까지나 심금을 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