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강렬한 소의 그림으로 익숙한 화가가 있다. 이중섭이다. 이중섭이 부산에 있다. 그의 삶의 자취가 부산 범일동 산마을에 녹아 있다. 그의 필생의 업보로 매진한 그의 분신 그림들과 함께.
그는 살아생전 소를 많이 그렸다. 어렸을 때부터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릴 때는 하루 종일 소만 바라보았다고 한다.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았다는 얘기도 있다. 일본인에게 황소는 일종의 조선의 민족성을 대변하는 동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그림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그의 화풍에는 향토적 요소와 어린아이들의 천진함이 깃든 동화적인 요소가 많이 담겨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부인, 자녀에 대한 사랑이 스며 있다.
일제강점기 서양화가 이중섭이 부산에 체류한 적이 있다. 6.25 전란 시 피난민으로 부산 범일동 판자촌에서 생활했다. 이를 계기로 부산 범일동에는 이중섭거리미술관을 조성하였다. 이중섭의 그림들을 탁본하여 거리 벽 곳곳에 설치하고 조형물을 조성하였다.
부산 범일동에 이중섭거리미술관 거리가 있다는 건 우리에게 행운이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정식으로 이중섭 미술을 볼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고, 미술관 전시 또한 특정 시기 일회성으로 공개될 뿐이다. 사시사철 이중섭을 느끼고 싶다면 이 거리를 방문하면 된다.
이중섭을 사랑하는 일반인들은 이 거리에 접어드는 순간 거리 곳곳의 조형물로 이중섭의 분위기를 흠뻑 느낄 수 있다. 이중섭의 원본 그림을 토대로 제작한 탁본이나 사본, 조형물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중섭의 소 그림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금과옥조 같은 그의 다양한 그림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중섭이 머물렀던 당시 이중섭의 삶과 부산의 현실은 꼭 닮았다. 부산은 전쟁 와중에 넘쳐나는 피난민으로 도시가 포화 상태였다. 도시민들의 생계를 뒷받침할 일자리나 물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중섭은 피난민 시절 부산에서 하루하루 생계를 잇기 위해 고단한 생활을 꾸려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에게 극도로 궁핍한 피난민 생활은 지탱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부두의 막일을 하면서 미술에 대한 열망을 이어갔다. 재료가 없어 버리는 엽서나, 담배 은박지에도 그림을 그렸다. 몇몇 은박지 그림이 이중섭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나중 1955년에는 주변 도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영광스럽게도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가난으로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다. 사랑하지만 애틋하게 갈라진 슬픈 상황 속에서 이중섭은 미술부 후배로 만난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를 늘 그리워한다. 아내 또한 이중섭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다. 사랑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다고 했던가. 빈궁한 삶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그리움은 잠재울 수가 없었다.
범일동 산마을의 기슭에 설치된 이중섭 전망대 난간 유리벽에는 두 사람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편지 글이 새겨져 있다.
‘나의 사랑하는 소중한 아고라
마음에 맺힌 긴 편지 두 통 함께 보았습니다. 당신의 힘찬 애정을 전신에 느껴 남덕은 마냥 기뻐서 가슴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 나는 온 세계의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의 남덕
* 아고라는 이중섭의 별칭이고 남덕은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의 한국 이름이다.
지금은 부산 범일동 산복마을이지만 그 당시에는 범일동 산마루 피난민 판자촌에서 일어난 애잔한 사연이다. 궁핍할수록 갈망은 커지고, 멀어질수록 그리움은 짙어지는 법이다. 이러한 이중섭과 같은 인생 스토리들이 당시 시대를 살았던 피난민 가족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을까. 한국 가정이라면 누구나 가정사 한 페이지로 피난살이의 애절한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중섭거리미술관의 희망길 100계단은 곧 이중섭 미술관이다. 계단 난간 양쪽에 이중섭의 다양한 그림들이 복제되어 설치되어 있다. 무심코 계단을 오르다가 황급히 첫 계단으로 돌아온다. 첫 계단부터 찬찬히 그림들을 보면서 여기서도 느린 걸음으로 걷기로 작정한다. 느릴수록 디테일한 내면들을 감지할 수 있다.
한 계단 오르면서 그림 한 점을 감상한다. 이 그림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작가는 당시 어떤 심정으로 이런 형상을 그렸을까. 추측과 억측, 상상의 꼬리를 펼쳐본다. 또 한 계단 올라 그림 한 점에 응시한다. 조금 전 아래 계단의 그림과는 화풍이 다르다. 이건 또 뭘까.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가? 회화에 관해 문외한이지만 혼자 호기심과 탐구심을 일깨우며 감상에 몰입한다. 이중섭을 알기 위해서. 이중섭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
예술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가? 예술 교양이 부족하지만 나만의 감상법은 이렇다. 감상의 법칙과 정도(正道)는 없다. 본인이 그 작품을 보고 감성적으로 소통하면 된다. 좋으면 좋은 느낌대로, 본인에게 별로면 신통찮다는 투의 기분으로 대면하면 된다. 물론 전문가가 평가하는 객관적인 걸작품이 있다. 하지만 그 걸작품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와닿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의 폭과 깊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피카소적인 화풍을 느꼈다. 자신의 심정을, 욕구를, 갈망을 추상적인 형태로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는 듯했다. 실제 마음속의 온갖 감정들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표현 형태가 있을까. 없다. 결국 예술가들은 이러한 감정 표현을 자신만의 창의적인 표현 기법으로 갖가지 표현 수단을 써서 현시할 수밖에 없다.
살아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 떠난 이중섭은 꼭 빈센트 반 고흐를 닮았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해 비참한 생애를 살다가 떠났다는 점에서. 떠난 후에야 비로소 후대에 예술가의 위대성이 발견되고 예술 작품의 진가가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치열했던 전란의 상황과 궁핍했던 사회적 상황이 그의 화풍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당시 암울했던 개인적 처지가 그의 감성을 한층 작렬하게 화폭에 투사하도록 이끌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