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과 갈등의 애환

거제포로수용소

by 갈잎의노래


거제도는 고즈넉하고 평범한 섬이었다.

조용한 어촌 섬이었던 거제도는 6.25 전쟁을 통해 큰 변화를 맞는다.

전쟁 포로와 피란민이 유입되어 순식간에 섬이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유엔군은 6.25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건설한다.

거제도포로수용소(Geoje-POW Camp)는 한국전쟁 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치되었다.1951년 2월에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건설되어 1953년 7월까지 운영되었다. 인민군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을 수용하였다.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거제도는 포로수용소로 적합하다고 보았다.

섬이라 육지와 독립되어 포로 관리에 수월하다는 점, 포로의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토지가 있다는 점, 전선 최후방에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다양한 국적과 계층의 전쟁 포로를 수용함으로서 당시에 가장 큰 포로수용소였다. 그래서 제1의 포로수용소라는 뜻에서 '캠프 넘버 원’이라고 불렀다.


6.25 전쟁은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이 적용된 첫 사례이다. 거제 포로수용소 포로들은 이전의 전쟁 포로와는 달리 굶주리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리지 않았다. 하루 일과의 지침 표대로 생활이 이루어졌다. 자치제를 도입하여 하루 세끼 식사를 직접 준비하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또한 체육대회가 개최되었고, 자체 연극 공연이나 음악회도 열렸다.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설치된 당시 영상을 보면 중국 포로들이 경극을 공연하는 장면이 나온다. 철조망 속에 갇힌 부자유 속에서 나름 자유로움을 누렸다.


사자춤 공연


통상 포로들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면 겪었을 배고픔과 강제 노역, 강압적 통제나 학대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그다지 일어나지 않았다. 포로수용소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경비하에 포로 자치제로 운영되었고 통제와 감시 가운데서도 자율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포로는 처분권을 가지는 적군의 손아귀에 생사가 달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포로 생활 중 북한군 포로들은 자신들의 생활 막사 근거지에 인공기를 내걸고 구호를 외치며 군사 훈련까지 했다. 이는 포로수용소 생활이 일방적인 강압으로만 운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여기에서도 이념의 대립은 비켜가지 못했다. 포로들 중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이로 인해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포로와 자유주의로 전향한 포로들로 나뉘게 된다. 소위 친공, 반공 포로들로 이원화되었다.


사상의 대립은 양 진영의 조직적 항거로 이어졌다. 친공포로는 해방동맹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투쟁하였고 이에 맞서 반공포로들은 대한반공청년단을 결성하여 대항하였다. 반공 포로들은 숫자에서 세력이 월등했던 친공포로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과 함께 위협과 시해를 수시로 당했다.

전장의 최전방에서 비켜나 있는 포로수용소에서도 6.25 전쟁 발발의 원인인 이념 갈등의 골은 깊었다.

휴전 협상이 진행됨에 따라 포로 송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즈음에 양진영의 갈등은 포로 송환 방식을 둘러싸고 첨예해졌다.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로 갈려 대립하였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포로들은 최종 송환될 국가를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당시 북한 측은 포로들을 북한으로 일괄적으로 송환해야 한다며 강제송환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에 반해 남한은 개인의 의사에 따라 송환될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송환 원칙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포로 송환의 문제를 두고 친공, 반공 양측 간의 사상 대립은 더욱 격하되었다.



심지어 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들은 조직적으로 강제송환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조직적인 투쟁 소요를 일으켰다. 1952년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F.T. 도드 준장을 납치했다. 그리고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등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은 한 달이 지난 6월 10일에야 진압되었다. 이 소요 사태를 계기로 포로들은 전국 각지에 분산 수용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친공포로들 위주로 잔류하였다.


공산군 포로 22,604명(중공군 14704, 북한군 7900) 국군. 유엔군 포로 359명 은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의사를 표했다. 당시 포로들에게는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원래 소속되었던 국가로의 송환(북한, 중국), 자유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으로의 전향, 아니면 남과 북이 아닌 제3 국행의 선택이다.

이러한 남북한의 이념 갈등과 대립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 소설은 해방 직후에서 6.25 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남북한 이념 대립 속에서 몰락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결국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한다. 그러나 제3국인 중립국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회의하며 결국 3국행으로 가는 배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거제도포로수용소는 폐쇄되었다. 반공 포로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천명으로 전국 각지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고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송환되었다. 현재 수용소는 일부 잔존 건물만이 남아 있다. 거제시는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조성하고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의 장소로 운영하고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의 역사적인 자료들은 전쟁의 최전선에서 벗어난 공간에서 일어난 전쟁의 상흔을 증언한다. 6.25 전쟁의 참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더구나 전쟁을 포로 인권과 관련지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있다. 거제시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냉전 이념으로 분열되어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었던 비극을 증언한다. 이념이 반만년 역사의 민족 공동체를 깨어버렸다. 6.25로 인해 수천만의 이산 가족이 발생했으며 부모 자식간의 애정도, 형제 자매간의 우애도 이념의 벽에 의해 단절되었다.

이념의 대결 양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이념의 언어들이 섬뜩하게 민족의 정서를 헤집고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의 실체는 곧 역사의 교훈이다.

동족상잔이 다시는 없어야 된다는 것을 일깨우는.

적대적인 이념의 언어가 인류애의 가치보다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인간을 위해 이념이 존재하는가?

이념을 위해 인간이 사는 것인가?..



사진출처: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전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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