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고 투박한 현무암 돌들은 제주 곳곳에 산재해있다. 이런 돌들을 차곡차곡 쌓은 돌담은 섬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다. 돌담은 제주의 풍경을 제주스럽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삐죽빼죽 모난 돌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돌담은 섬 전역을 돌며 굽이쳐 흐른다. 이름하여 흑룡만리이다. 검은 현무암의 돌담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모습이 흑룡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수천 년간 제주 전역에 쌓인 밭담의 길이는 총 2만 2천108㎞나 된다. 무려 지구 둘레가 대략 4만㎞이니 길이가 지구 반 바퀴를 넘는다.
제주의 돌담은 기능과 용도에 따라 다양하다.
농부가 일하는 밭에서는 밭담이 둘러져있다. 밭담은 바람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고, 우마들의 농경지 훼손을 막으며 밭 소유의 경계를 구분 지웠다.
마을 집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집의 담 역할을 하는 집담이 있다.
마소가 풀을 뜯는 목장에는 마소의 무단 이동을 막기 위해 둘러친 담인 잣성이 있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골목과 집 뜰 사이에는 올레 담이 있다.
해녀가 물질하는 바닷가에서 해녀들의 탈의장 겸 쉼터 역할을 했던 불턱도 생활 돌담이다.
게다가 바닷가에 낮게 쌓은 돌담이 있는데 물고기를 잡기 위한 원담(갯담)이다. 밀물 때 물고기가 들어오게 한 후 썰물 때 못 빠져나가도록 해서 물고기를 잡았다.
성벽 역할을 했던 돌담도 있다. '성담'은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백성들이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죽은 이의 묘에도 담을 처 두었다. 무덤 주위에 쌓은 돌담을 '산담'이라고 한다. 마소가 침범하거나, 들불이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방을 두껍게 겹담으로 둘러쳤다.
이렇듯 제주의 돌담들은 주민들의 삶 속에서 다양하게 기능하고 풍요롭게 역할한다.
하지만 돌담을 낭만적으로 쉽게 볼 일만은 아니다. 제주 전역을 굽이치는 돌담은 지난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제주민의 고단한 노동의 결실이다.
돌담은 하나하나 손수 노동을 통해 쌓은 공든 담이다. 과거 돌담을 쌓을 때에 지금처럼 유용한 장비나 기구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한뜸 한뜸 바느질로 해어진 옷을 깁듯 돌조각 한 덩이 한 덩이를 요모조모 형태와 크기를 견주어가며 손수 사람 노동으로 차곡차곡 쌓아갔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놀랍게도 마치 쌓은 돌담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주변 풍경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돌담에는 자연환경과 교감하며 살아온 강인한 제주민의 슬기로움과 억척스러움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척박한 땅이라 제주도는 예부터 논농사가 어려웠다. 밭작물 재배가 주 농사였다. 그러면 밭 터는 어떻게 일구었을까. 말없는 밭담의 돌이 무언으로 말을 건넨다.
돌무지 땅을 삶의 터전으로 일구게 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돌담이 탄생했다.
용암 분출로 형성된 땅을 덮고 있던 바위를 조각조각 캐냈어 경작지를 개간했다. 수많은 크고 작은 돌들을 하나하나씩 캐내고 걸러내어 지금의 밭을 일구었다. 밭을 일구면서 캐어낸 돌을 마땅히 버릴 곳이 없어서 주위에 쌓았던 게 바로 '밭담'이다.
길게 드리워진 밭담에서 밭을 개간했을 당시 힘겨웠을 누군가의 노동에 연민을 느끼면서 지금과 같은 밭을 조성해낸 결실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의 밭담에는 끈질긴 생활력이 서린 노동의 애환이 담겨있다. 곧 밭담은 척박한 환경에 맞서 온 인간 승리의 증거이다.
제주 밭담은 가히 미학적이다.
제각각의 꼴을 가진 돌들이 엉성한 듯 포개진 돌담에서 친근감이 감돈다.
검은색의 현무암으로 둘러친 밭담 안 유채꽃밭에서 유채꽃의 노랑 빛깔은 더욱 돋보이고, 푸른 청보리밭을 감싸는 검은 빛깔 밭담은 청보리색을 더욱 짙푸르게 한다, 검고 투박스러운 감자 밭담은 새하얗게 핀 감자꽃 빛깔을 화사하게 하고, 검은 돌로 담 쳐진 메밀밭의 메밀은 누런 빛으로 풍요로움을 안긴다. 이렇듯 제주의 거무스레한 밭담은 운치 있게 제주의 각양각색의 밭작물 색채를 산뜻하게 채색한다.
밭담은 밭의 외곽을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지형 형편에 맞게 구획해서 쌓았다. 주변 지형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주위 형세와 조화롭다. 풍경이 돌출나거나 직방형 형태가 아니기에 푸근한 정감마저 든다.
제주의 담들은 정겹다. 밭담들과 집 담들은 대체로 자그마한 높이이다. 내 땅과 네 땅의 소유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확연히 구획 짓는 도시의 담벼락처럼 높지 않다. 이웃집과 말 그대로 편의적인 구분의 경계로서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서로 간에 불신의 장벽이거나 마음의 벽을 쌓은 담이 아니다.
돌담에는 제주민의 지혜가 녹아 있다.
돌담에는 폭풍우에게도 걲이지 않는 내공이 있다. 제멋대로의 돌들을 엉킴성킴 쌓아 놓았을 뿐인데 거친 강풍에도 거뜬하다. 돌과 돌 사이에 얼기설기 뚫린 틈새가 비밀이다. 돌과 돌 사이에 숭숭 뚫려있는 구멍이 바람을 맛 받아치지 않고 통과시켜 돌담 구조물을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다. 폭풍에도 거뜬히 돌담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엉성하게 보이기조차 하는 돌들 간의 짜임새가 여백을 품고 구조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누르고 받혀주고 기대면서 엮어진 돌들 간의 교합은 견고함과 지탱력을 발휘하며 버팀목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우리 인간 사회도 서로 밀어주고 받혀주고 의지하면 더욱 단단하고 행복하지 않을까. 돌만도 못한 인간일 수는 없지 않은가.
돌담은 생활 방편의 기능을 넘어 제주도의 문화 자산이 되었다.
제주의 돌담 밭은 2013년 1월 국가중요농업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돌은 제주 역사의 주춧돌이요 풍습의 한 축이다. 화산 폭발과 용암 분출로 형성된 제주에서 돌과 사람은 삶에서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돌담은 제주의 과거의 민속이자 현재의 자산이며 미래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