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길
제주올레는 걷는 길이다.
무심한 마음으로 걷는 길이다.
올레의 모태대로 그냥 “놀멍, 쉬멍, 걸으멍“이다.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발길 따라, 눈길 따라, 마음 따라 걷는 길이다.
하지만 길이 펼쳐 보이는 각양각색의 울림에 귀 기울이며 꼬닥꼬닥(천천히 혹은 느리게) 걷는 길이다.
총 26개 코스 425km.
코스 완주에 너무 계획적이고 목적지향적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올레 길을 걷는 목적은 삶에서의 강박관념을 벗어나는 데에 있다. 빈틈없이 짜여진 생활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나서는 길이며, 무의미한 일상적인 삶의 구속에서 탈피하고자 걷는 길이다. 하루하루 터벅터벅 걷다 보니 완주하는 것이지, 완주를 예정한 후 짜임새 있게 걷는 길은 아니다.
올레 길을 걸으면 지금껏 나의 삶을 지배했던 생각을 되짚어 보게 된다. 나를 지배해 왔던 생활 가치관에 반기를 들면서 삶의 반전을 꾀해 보고프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도래한 계몽의 시대는 현대인에게 행복만을 안겨줄 줄 알았다. 발전과 개발은 삶을 풍요롭게 할 줄로 믿었다. 그러나 계몽은 합리성을 지나치게 찬양하고 풍요는 탐욕스러운 소유욕을 부추겼다. 계몽주의로 실현된 인간 생활의 합리성 속에는 인간을 지배, 통제하는 억압의 합리성도 그 이면에 내재되어 있다. 풍요의 시대임에도 가진 자는 물질의 탐욕이 더욱 거세고 없는 자는 더욱 빈곤의 나락에 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었다.
과거 느림의 삶들이 차라리 인간적이지 않았을까라는 회한이 들고, 첨단 시대에 걸맞지 않고 촌스럽다던 옛 지혜들이 오늘날 새롭게 생활의 깨우침으로 성큼 다가온다.
올레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합리성과 편리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길 걸음이다. 비합리성, 불편함을 우직하게 체험하고자 한다. 일직선으로 가면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구불구불 돌아 걷는다. 편리한 곧은 도로보다는 시골 흙길을 굽이굽이, 마을 골목길을 구석구석 걸어면서 상념에 젖는다.
천천히 걸어야 주변의 온갖 풍경들이 세세히 보인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진기한 생태의 모습들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올레 길에서 느림과 여유의 미학을 배운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 금이다.”라는 모토에 과잉으로 사로잡혀 있다. 느림을 게으름으로 치부한다. 여유를 속 편한 한가로움으로 비아냥한다. 반문해본다. 무엇을 위한 빠름이며, 빠른 삶의 최종 목적지는 무엇일까. 최종 종착지만 바라보다가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올레 길은 곡선과 여백을 중요시한다. 생활의 곡선, 삶의 여백이 인간에게 행복한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쉼 없는 열정, 목적지향적 추구만 있는 삶은 마음을 쇠락하게 하고 몸을 고단하게 한다. 짬짬이 여백이 없는 생활에서는 내면을 되돌아볼 수 없다. 삶을 자성할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성찰이 없는 삶에서 생활의 활력이나 새로운 삶의 반전을 찾기 어렵다.
올레 길은 목적 합리성에 갇혀 긴장되고 경직된 우리네 몸을 해이하게 한다. 뭔가에 꽉 동여매여진 강박관념을 느슨하게 이완시킨다. 지친 심신의 스트레칭을 돕는다.
제주올레 길에는 미니멀리즘 철학이 담겨있다.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하다는 물질 행복의 공식이 올레 길에서 깨어진다. 무소유의 가치를 되씹어보게 만든다. 적은 소유만으로도 가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주지한다.
많이 가진 자는 새로움을 채울 공간이 없다. 욕심, 과욕, 물욕, 탐욕을 버려야만 신선한 삶의 내용들이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작고 홀가분한 짐을 짊어져야만 먼 곳까지 갈 수 있다. 많고 무거운 짐을 움켜쥔 자는 먼 곳을 향할 수 없다. 현재를 움켜쥐고 앞가림에 집착하면 새 세상을 꿈꾸기 어렵다.
올레 길을 걷노라면 소유욕에로의 집착을 내려놓게 된다.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외향으로 치장된 겉보기가 아닌 속살 보기를 통해 세상살이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한다.
올레 길은 나를 자연 속으로 끌어당긴다. 올레 길을 걸으면서 자연의 심오한 생리와 생태계의 이치에 점점 몰입하게 된다. 자연과 담쌓고 멀찍이 떨어져 인공적 존재로 지내왔던 자신을 자연에 동화시켜 보고픈 욕구가 움튼다. “나를 품고 있는 자연 앞에서 나 자신 또한 자연의 일부가 아니던가.” 이 명언을 깨우친다.
제주올레 길의 철학은 “놀멍, 쉬멍 걸으멍”에 녹아 있다. 길을 즐기면서 마음껏 사색하는 것이다. 올레 길의 맛을 만끽하는 과정에 의미 있는 삶과 건강한 생태계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된다. 곧 제주올레의 가치는 길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 길을 걸으면서 위로를 받으며, 길을 걷는 과정에서 강건해지고, 길에서 심적인 치유의 힘을 얻는 것이다.
제주올레 길, 앞만 보고 걸을 게 아니라,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한다. 올레 길은 오지랖 넓은 여편네처럼 길 위에서 만나는 온갖 것들에 주책없이 개입하는 것이다. 길 돌담, 밭, 길 주변의 풀, 나무, 꽃, 야산, 바다, 경작물, 집, 동물 등 눈에 비치는 모든 생물, 무생물에 마음으로 간섭하고 관심 어린 눈길을 주는 것이다. 형형색색 다채로운 자연경관에 감탄하고, 길 주변에서 한껏 뽐내는 풀 내음을 들이키며, 화사한 꽃 자태에 감동하며 한걸음 한 걸음씩 내닫는 길이다. 올레 길 걸음은 재촉하는 어른 뜀박이가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뗄때마다 온 정성이 깃든 아기 걸음마이다.
쉬엄쉬엄 걷다 뒤돌아보면 벌써 이만큼이나 걸어왔고,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떼다 보면 먼길의 종착지가 마침내 눈앞이다.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기 보다 걷다 보니 목적지이다.
제주올레 길은 힐링의 길이다.
자연에로의 길이자
인간에로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