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이다. 법궁은 왕이 거처하는 궁궐 중 으뜸 되는 궁궐이다. 태조의 조선 건국과 맥을 같이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도읍을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긴 후 세운 궁궐이다.
경복궁은 위로는 백악산이 있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인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대로)가 있었다. 정도전이 지은 ‘경복’이란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은 건축 양식에 유교 철학인 성리학적 원리를 접목시켰다. ‘검이불루 화이불치(檢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경복궁은 새로운 국가의 지평을 여는 구조물이었으므로 당대 최고급 건축 기법이 동원되어 지어졌다. 공인된 국가 최고의 정통성 있고 권위 있는 궁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건축 과정도 엄정한 설계도에 따라 건축되었다. 기하학적으로 적정하게 공간을 분할하고, 반듯한 축선 위에 건물들을 배치했으며, 질서 정연한 대칭 구조로 공간을 구획하고 구조물을 배열하였다.
안타깝게도 조선 왕조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 한 국가의 통치의 상징이자 중심이었던 경복궁은 그 후 200여 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고 소실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후 구한말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자 왕권을 높이고 중앙 집권 권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경복궁을 중건하게 된다.
우려곡절 끝에 재건된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 또 한 번 의도적으로 궁궐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근정전 앞으로는 조선 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 일제는 전통 전각을 허물고 부재를 팔아넘겼고, 경내에 박물관도 만들고 불교 유물인 탑도 세웠다. 급기야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구실로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경복궁의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다. 홍례문과 동궁 등이 복원되었고, 2010년에는 광화문도 복원되었다.
창덕궁은 조선 태종 때 지은 제2의 궁궐이다. 임진왜란 이후 순종 때까지 약 270여 년간 조선의 정중 역할을 하였다. 현재 조선 궁궐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일컫어진다.
창덕궁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이 있어서 다소 딱딱할 것 같은 궁궐 공간의 매력을 높였다.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면서도 왕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자연 지형과 조화롭게 아담한 정자를 세우고 연못, 정자, 수목 등을 배치하였다.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고, 자연을 더욱 미적인 자연스러움으로 완성하였다. 조선 궁궐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창덕궁 후원은 한국 전통조경의 아름다운 진수를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다른 궁궐보다 창덕궁을 사랑한 왕들도 많았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개 궁궐 중 유일하다.
경운궁(덕수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자 1593년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던 궁이다. 월산대군 저택을 개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불렀다. 이후 1611년 광해군이 중건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경운궁을 정식 궁궐로 승격시켰다.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이후 경운궁의 위상과 면모는 급격히 낮아졌다. 궁궐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잃고 세간에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1897년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황궁이 됨으로써 다시 주목받게 된다.
구한 말 일제에 의해 왕비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다. 소위 아관파천이다. 이후 환궁할 때 을미사변의 참사를 목도한 만큼 신변 보호에 적합한 장소를 염두에 두었다.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제쳐두고 경운궁을 선택했다. 고종은 어느 순간 자신도 위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나머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비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였다. 경운궁 인근은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이었다. 러시아 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이 지근거리에 있었다. 이들 외국 공관들이 유시시 일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막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로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경운궁이 재등장했다. 고종은 죽을 때까지 경운궁에서 지냈다. 1907년 고종황제가 물러나면서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명명되면서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경운궁(덕수궁)은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곳이다.
경운궁(덕수궁)은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많이 훼손되었고 대한제국 시절의 1/3로 크기로 줄어들었다.
창경궁은 1484년 조선 성종이 선왕의 세 왕비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궁궐이다. 즉 세조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소혜황후, 작은 어머니인 안순황후이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리면서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도 독립적인 궁궐의 형태와 역할을 가졌다.
창경궁에는 익히 아는 역사적인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던 장소이다.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한 곳도 이곳이었고, 숙종 때 인현왕후와 장희빈 갈등 사화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창경궁은 일제 강점기 때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다. 일제는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길 즈음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의도는 조선 궁궐의 권위를 깍아내리려는 데 있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에 지어진 궁궐이다. 1617년 짓기 시작하여 1620년에 완성하였다. 경희궁은 왕과 왕비를 비롯한 후궁 등이 생활한 일상 공간이었다. 도성 서쪽에 있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해서 서궐이라고 칭했다. 경희궁은 숙종부터 정조 즉위까지 최전성기였으며 경희궁에서 살았던 왕은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에 이른다. 왕족으로서 인형왕후, 희빈 장씨, 혜경궁 홍씨도 경희궁에 살았다.
경희궁 또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게 훼손된다. 특히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면적이 본래의 절반 정도만 남아 궁궐의 모습과 위상을 잃어버렸다.
궁궐에는 당대의 문화와 문명이 집대성되어 있다. 선조들의 건축 기술, 건축 미학, 건축 사상과 철학이 담겨있다. 궁궐의 수난사는 우리 역사의 수난사이다. 궁궐의 훼손 시기는 우리 민족이 아픔을 겪은 시기와 겹친다. 건축물의 소실과 훼손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문명의 손상일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정신에 가해진 생채기이다.
조선 궁궐에 점철된 역사가 현시점에 상기시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아갈 바람직한 미래 역사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우리가 답해야 할 진중한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