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손맛과 그 손맛을 닮아가고 싶은 나
전라도에서 한식 식당을 오랜 기간 운영해오셨던 할머니의 손맛이 무뎌진 것은 몇 년 전이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나의 엄마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손맛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나와 동생을 키워주셨으니 말이다. 손맛이 무뎌지지 않으셨다는 것이 더 이상할 법도 하다.
어릴 적에는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이라면 뭐든지 맛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한 차례상에 올라가던 음식도, 학교 가기 전 바쁜 아침 후후 불며 먹었던 누룽지도, 김장을 하시고 맨손으로 죽죽 찢어 주시던 배추김치도. 사실 할머니의 음식이 맛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유별나게 맛있는지는 몰랐었다. 할머니의 음식만 먹고 자랐던 나에게는 당연하게 맛있는 맛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유명한 한식 식당이라고 해서 찾아가면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맛이다!’ 혹은 ‘우리 할머니가 예전엔 이보다 더 잘 만드셨는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할머니는 밥집을 운영하시면서 오 남매를 키워오셨다. 우리 아빠는 오 남매의 넷째 아들이다. 우리 아빠를 이만큼 멋진 사람으로 자라게 해 준 것은 다 할머니의 손맛 덕분이다. 할머니, 아빠의 엄마, 또 나의 엄마. 아빠는 지금도 할머니의 꼬막 무침을 잊지 못하신다. 할머니가 아직까지도 팔을 걷어붙이시고 하시는 요리가 바로 꼬막 무침이다. 요즘에는 힘이 없어서 꼬막을 까는 것이 힘드시다며 나에게 꼬막을 좀 까달라고 부탁하신다. 나는 나보다 성격이 급하신 할머니가 꼬막과의 사투를 벌이다 화나시지는 않으실까 하는 마음 삼분의 일, 할머니의 손맛을 배우고 싶은 마음 삼분의 일, 설탕과 소금을 헷갈리시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 삼분의 일을 가지고 꼬막 까기에 돌입한다.
꼬막을 까려면 일단 옷핀이 필요하다. 꼬막은 쉽게 입을 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앙다문 꼬막의 입 사이로 보이는 작은 틈새에 옷핀을 찔러 넣는다. 작은 틈새마저 없는 꼬막은 잠시 후에 까기로 제쳐두고! 비교적 까기 쉬운 꼬막을 다 까고 난 뒤, 틈새가 잘 보이지 않는 꼬막의 없는 틈 사이로 옷핀을 찌르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아, 내가 먹었던 꼬막 비빔밥의 가격이 비쌀 만도 하구나. 꼬막무침, 참 시작부터 쉽지 않구나. 꼬막의 껍질을 까는 것도 꼭 반만 까야한다. 할머니는 한쪽 껍데기가 꼬막에 붙어있어야만 양념이 잘 베어 들어 더 맛있다고 하셨다. 어쩌다 반쪽의 껍질마저 잃어버린 집 없는 꼬막 아이들은 내 입속에 넣어준다. 아직도 바다의 짠내를 머금은 집 없는 꼬막이 꼬들꼬들 씹힌다. 다 씹히지 않고 넘어간다. 쫄깃한 식재료의 특성상 끝까지 씹을 수는 없다.
할머니는 2번에 걸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던 적이 있다. 뇌졸중은 각종 암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질환으로 가장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 무서운 질병이다. 할머니는 2번이나 생사의 고비에서 살아남으신 것이다.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처음 쓰러지셨을 때 할머니를 발견한 것은 나다. 대학교 신입생 쯔음의 시절,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며 지냈던 내가 새벽에 늦은 귀가를 하던 날.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가 침대 아래 구석에서 조용히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처음 보는 할머니의 모습에 놀라서 할머니를 깨우려 노력했지만 깨울 수 없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안방으로 달려가서 주무시는 부모님을 깨웠다.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동생도 일어났다. 우리는 119 구급대를 부르고 아빠와 나는 구급차에 함께 탔으며, 엄마와 동생은 집에서 기도를 하다가 오후쯤에 병원으로 왔었던 것 같다. 경황이 없던 상황이라 모든 기억이 흐릿하지만 내 기억에 가장 크게 남았던 것이 몇 가지 있다. 그래도 내가 할머니를 살렸다는 생각과 할머니가 아파서 어떻게 되실지 모르는 와중에도 졸렸으며 밥이 넘어갔었다는 것 정도이다.
사실 요즘은 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의 맛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 전에는 앞머리에 난 새치 3-4개를 뽑으며 나의 늙어감을 한탄하기도 했다. 나도 나이가 많이 들기는 했다. 할머니의 젖을 엄마의 젖인 양 물던 내가 이제는 새치를 뽑는다니. 자라나는 하얀 머리만큼 기억도 점점 잊혀가는지 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의 맛을 하나하나씩 잃어갈 때마다 공허함이 밀려온다. 할머니에게 몇 가지 요리법을 직접 전수받은 나의 경험에 따르면 할머니의 한식 레시피는 결코 글로 담을 수가 없다. “할머니, 이건 어떻게 만들어?”라고 묻는 내 질문에 할머니는 대부분 “고춧가루 조금 넣고, 간장 조금 넣고, 마늘 넣으면 돼!”라는 말씀만 하시기 일쑤다. 사실 정말 고춧가루 조금 넣고 간장 조금 넣고 빻은 마늘을 넣다 보면 어느새 그럴싸한 한식이 완성되기도 하니 참 신기하다. 전라도 한식 밥집 사장님 출신 할머니의 손맛을 어깨너머로 봐온 기간만 20년이 넘으니 나도 얼추 준 한식 전문가쯤은 되지 않을까? 물론 깔끔하게 맛있는 한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레시피를 찾아봐야만 한다. 한식을 만들 때는 생각보다 순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차돌된장찌개를 끓여보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찌개를 꼽으라면 단연 차돌된장찌개! 차돌박이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얇은 소고기를 냄비에 넣고 들들 볶는다. 어느새 기름이 새어 나온 고기는 팬에 구울 때보다는 촉촉함을 머금고 있다. 촉촉하게 볶아진 고기에 물을 붓는다. 여기에 얇게 채 썬 무를 넣으면 맛이 더 좋다고는 하나, 무가 없으니 패스! 쌀뜨물이나 육수가 더 좋다고는 하나, 미리 만들어놓지 못했으니 패스! 그냥 생수를 넣어 끓이기 시작한다. 없는 재료를 뛰어넘어가는 것도 집밥만의 매력이지 않을까. 보글보글 끓어가는 고기 국물에 된장과 고추장, 후추를 적당히 넣어준 후 틈틈이 맛을 본다. 맛있다 싶은 정도면 충분하다. 나의 비율은 된장:고추장, 2:1의 비율이다. 그 정도면 딱 좋더라. 이때쯤에는 찌개라고 하기에는 약간 싱거운 것 같아도 괜찮다. 끓이다 보면 짜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간을 맞춘 뒤에는 애호박, 두부, 대파, 버섯 등을 송송 썰어내어 국물에 투하! 배부르고 든든하게 먹고 싶을 때에는 국물의 양에 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재료를 넣어줘도 괜찮다. 오늘은 과하게 먹고 싶은 날이니 국물에 가득 차게 재료들을 넣었다. 아참, 두부가 없어서 두부는 또 패스! 마지막으로는 고춧가루를 적당히 뿌려준다. 두부가 없어도 맛있기만 한 차돌된장찌개 완성이요!
이번 차돌된장찌개는 바쁜 다른 가족들을 제외하고 할머니와 내가 둘이서 오붓하게 먼저 먹었다. 할머니는 오늘 내가 차려드린 한식 밥상이 마음에 드신 건지 밥을 한번 더 떠오셨다. 맛이 없는 음식이라면 입에도 대시지 않는 할머니이니 이쯤이면 성공적이지 않나. 일을 마치시고 늦게 돌아오신 엄마는 나의 차돌된장찌개를 맛보시고는 역시 다시 밥을 뜨러 가셨다. 할머니의 평가를 통과했으니 엄마의 반응은 안 봐도 뻔했지만!
맛있게 무치기 위해 한쪽 껍데기만 남긴 꼬막은 꼬막 무침의 대가인 할머니를 꼭 닮았다. 두 번의 뇌졸중을 겪으시고 나이가 점점 더 들어가시면서 언어에 대한 능력이 많이 떨어지신 할머니는 삶을 쥐고 있던 껍질 하나를 놓아버리신 것 같다. 하지만 할머니의 남은 껍질 하나가 여전히 할머니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기에 할머니의 삶은 맛있다. 여전히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산책을 하시는 할머니, TV 속 잘생긴 연예인을 보시며 기뻐하시는 할머니, 트롯 프로그램의 트롯을 따라 부르시며 흥겨워하시는 할머니는 오늘도 맛있는 인생을 사신다.
얼렁뚱땅 만들어진 맛있는 차돌된장찌개는 나를 꼭 닮았다. 갑자기 차돌된장찌개가 먹고 싶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대충 재료를 사들고 와서는 얼렁뚱땅 끓여냈지만 결국 우리 집안 대들보인 여자 3대를 만족시킬 만한 맛을 만들어낸 나! 가히 할머니의 손녀답다. 손맛을 잃어가는 할머니와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음식 맛의 기억을 잃어가는 나이지만 우리의 오늘도 참 맛있다. 나는 얼렁뚱땅 맛있는 차돌된장찌개를 끓여냈고, 할머니는 껍질이 반밖에 남지 않았지만 모든 양념을 품은 꼬막 무침을 만들어 내셨기 때문이다. 할머니, 곁에서 오래오래 꼬막을 무쳐주세요. 아니, 꼬막을 까고 무치라고 지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