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왠지 봄내음이 나는 것 같다 말했고 너는 아직 겨울이랬다.
나는 왠지 봄내음이 나는 것 같다 말했고 너는 아직 겨울이랬다. 하늘이 맑고 햇빛이 전보다 따스한 것이 봄이 성큼 다가왔나 보다. 공기는 아직 차갑지만 주머니에 넣어 따듯한 오른쪽 손보다는 차가워도 너와 맞잡은 왼손의 느낌이 더 좋다. 손이 얼 거 같다는 너의 말에 내 겉옷의 작은 주머니로 우리 두 손을 비집어 넣어본다. 오래 알아온 너지만 난 아직도 너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설렌다.
너는 나무의 바싹 마른 가지를 보면서 저것 좀 보라며 아직 겨울이라고 하다가, 또 다른 나무의 작은 봉오리들을 보면서 내 말에 동조해줬다. 봉오리가 나기 시작하면 봄은 봄이라고. 우리가 우리로 묶여 처음 맞이하는 봄이다.
네게 벚꽃을 보러 가자고 말했다. 나는 기약 없는 약속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밥도 안 먹을 거면서 괜히 밥 한번 먹자거나 가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같이 여행 가자거나 하는 거 말이다. 텅 빈 약속은 인사치레로라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내가 벚꽃을 보러 가자함은 벚꽃이 피는 날까지도 너를 보고 싶다는 뜻이다. 벚꽃이 피려면 두 달은 더 있어야 하려나. 나는 적어도 두 달은 더 너와 함께하고 싶다. 벚꽃 아래서 환히 웃어 보일 네가 궁금하다. 봄의 너는 어떤 사람일까.
이렇게 말하면 네가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온전히 서로만을 바라보는 연인이 참 신기했다. 세상에는 수 없이 다양한 매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다. 결혼이라는 법과 제도에 묶인 부부라면 사정이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 구두계약처럼 연인이 되겠다는 약속 하나로 묶인 청춘 남녀가 오직 서로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닌가. 인류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한 부분의 존재로서 씨를 뿌리고 자손을 번성시키고자 하는 본능을 억제하고 윤리적이게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것.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확신도 별로 없을뿐더러 독점적인 연인관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었다. 이번 생의 짧은 기간 중에서도 가장 짧고 화려할 이 청춘의 순간에 어찌 한 사람에게 묶여 있으란 말인가. 몇 번의 겨울을 함께 했지만 결코 봄일 수 없었던 우리에게 이번 봄이 처음인 것도 이유가 있었겠지.
너는 나를 너에게만 묶여있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너에게서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묶여있지 않고 떠날 수 없는 관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관계가 아니던가. 처음 만났을 때의 너는 어린 네 나이보다도 한참을 더 어린 얼굴을 하고서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었다. 식단마저 하고 있는 것인지 늦은 시간이라고 과자 한조각도 먹지 못하고 물만 들이켜는 모습이 참 귀여워 보였다. 착하고 성실하고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예쁘게 자란 딸, 그게 네 첫인상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을 별 시답지 않은 오해를 핑계로 마무리한 후에도 너에게서 종종 연락이 왔었다. 대부분은 술에 취해있을 시간이었고 너는 내가 어디냐며 묻거나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지난 인연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나임에도 그런 너의 연락을 모질게 끊어내지 못했던 건 너와 나를 잇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네가 연락을 해올 때면 나 역시도 네가 너무 그리웠지만 우리는 결코 몇 년간을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사랑을 목매듯 갈구하는 네 모습이 괴로웠었다. 평범하고 착실하게 잘 지내듯이 보이는 네 삶 어딘가에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인지 너는 그 부분을 채우지 못해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네 빈 공간을 채워줄 만큼의 열정이 없었고 내 삶도 그리 녹록지 않았기에 네 손을 잡아줄 수가 없었다. 너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착하고 조용하게 사랑받을 만한 행동들만을 했었다. 나에게 역시 그랬는데, 내가 지금보다도 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많이 했음에도 화 한번 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화를 내며 울고 있다고 말하는 네 연락을 듣고 네가 화도 낼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놀랐던 적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내 마음은 알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 복잡하기도 해서 사랑받을 만한 행동이 곧 사랑 받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너는 네가 베푼 사랑의 무릎 정도 오는 사랑만을 되돌려 받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사랑이 많은 여자, 사랑을 받고 싶어 하며 사랑을 나누는 여자, 사랑을 받아도 사랑이 부족한 여자.
지난 몇 년간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연락 한 번 없던 네게 연락이 와서 신기했다. 다시 만난 너는 좀 더 차분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빛이 나지만 어딘가 슬퍼 보였고 아직도 수줍은 듯 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또 다른 모습을 가진 네가 궁금해졌고 그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봄 내음이 난다.
내가 너무 바싹 마른 가지처럼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지냈던 걸까. 오면 좋은 거고 가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합리화하며 소중한 관계들을 잃고 있었던 건 아닐까. 너를 보면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네가 나에게 다시 연락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봄내음을 다시 맡을 수 있었을까.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가고 내 기억 속에서 또 잊혀간다. 그 숱한 만남들 가운데 내가 붙잡아야 할 의미는 무엇일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모든 사람들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한 사람만의 매력을 결정짓는 방점은 사실 엄청나게 대단한 어떤 것은 아니다. 왠지 더 맡고 싶은 살내음, 잘 관찰해야만 보이는 사소하고 작은 배려, 무언가에 몰두할 때 빛나는 눈빛, 완벽하지는 않지만 왠지 괜찮은 조화를 이루는 것 같은 매력적인 이목구비,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건네는 환한 미소, 타인을 위한 조건 없는 작은 친절, 웃을 때 뒤로 넘어가는 큰 제스처,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짓는 표정, 술이 달다며 탈탈 입으로 털어 넣는 모습, 무언가를 열심히 배우고 발전하려는 태도 등과 같은 사소한 차이들이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네가 마른 가지보다는 피어나려는 꽃봉오리만 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겨울이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떨어지는 계절일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떨어지는 낙엽의 양분으로 봄을 준비하는 시기일 수도 있다. 우리의 긴긴 겨울이 앞으로의 봄을 위한 엄청나게 길었던 준비과정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나 스스로 목줄을 내 목에 걸고 조금은 두려운 네게 그 줄을 맡겼으니 네가 봄내음을 맡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