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보다 길어진 서론.. 본론보다 찬란한 서론
2살 터울 남동생이 태어나자, 저는 젖을 떼기 위해서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 1567번지 할아버지, 할머니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3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말 그대로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숙제도 없고, 해야할 일도 없고, 가끔 할아버지가 구들목에 불을 때면 불쑤기개로 한번씩 쑤셔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동네 형들이랑 뒷산이나 밭두렁에 모여 앉아서 놀다보면 해는 서산 너머로 지고 땅거미가 내리면 밭에서 일하시던 할머니가 집으로 데리고 가곤 하셨습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었습니다. 항상 시간이 오는 건 더디고, 시간이 가는 건 쏜살같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풍가는 날은 몇 밤을 세어야 왔고, 놀다보면 시간은 항상 가는지 모르고 지나갑니다. 인간은 원래 놀기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돈 버는 일이 더 자유롭게 더 많이 놀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시간이라는 물살에 떠내려가는 종이배처럼 위태롭게 뒤뚱거리며 갑니다. 강폭이 좁아지고, 중간 중간에 바위가 있어 소용돌이 치는 급류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 주변의 풍광을 즐길 시간 없이 종이배에 들어온 물을 퍼내기 바쁘고, 배가 뒤집히지 않기 위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해가 서산에 지고, 땅거미가 내리던 그날 저녁을 아직도 가끔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가던 저는 시간의 유한함을 희미하게나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또 놀았습니다. 이제는 할머니의 손 대신에 키보드와 마우스를 양손에 잡고 야근을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가는지 일일이 시계를 보며 확인하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시간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시골 집들에서 불을 때며 밥 짓는 광경을 지켜봅니다. 시골 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며, 그 날 저녁 밥상을 생각합니다.
난 아직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에 2박 3일 휴가를 내고 떠나는 가족여행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제 세 밤만 자면 제주도에 갑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시골 집 굴뚝 대신에,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오손도손 저녁식사를 하는 광경을 꿈꿉니다. 저에겐 아직도 많은 날들이 남아 있습니다. 길어진 그림자의 길이는 이내 어움 속에 묻혀버립니다. 해는 떨어졌지만, 달은 차서 서산에 떴습니다. 백열등 하나에 기댄 채 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습니다. 그리고 씻기 귀찮다는 응석을 받아드린 할머니는 행주에 물을 묻혀 손과 얼굴을 닦아 줍니다.
오늘은 서론이 무척이나 깁니다. 길어진 서론으로 오늘 본론을 대신합니다. 때론 서론이 본론보다 더 찬란할 수도 있습니다.
P.S 오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해야 할 듯합니다. 이제 곧 업무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