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냉장고 앞에 서다.

새로운 생각, 오래된 생각 그리고 기발한 생각

by 정윤식

생각의 냉각의 앞에 섰다. 냉장고를 문을 열자, 냉장고 안을 밝히는 불빛이 들어왔다. 맨 앞쪽 칸에는 신선하게 바로 먹고 마실 수 있는 신선한 생각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위쪽 앞자리를 들추다 보니, 가장 깊숙한 곳에는 아주 오래 전에 산 유통기한을 넘긴 오래된 생각들이 채워져 있다. 마지막으로 맨 아래 채소칸에는 며칠 전 오랜 만에 만난 친구가 준 아주 새롭고 기발한 생각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의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난 귀차나즘이 발동해서 언제나 손쉽게 꺼낼 수 있는 새로운 생각이나 입맛을 자극하는 기발한 생각을 늘 꺼낸다. 새로운 생각은 떠오르는 단상들을 묵혀두지 아니하고 머리 속에 기억해 두었다가, 언제고 꺼내 먹을 수 있도록 냉장고 맨 앞 칸에 둔다. 그래야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꺼내 마실 수 있다. 새로운 생각의 생명은 신선도에 달려 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즉각적인 단상이나 의사결정 영역이 여기에 속한다. 삶의 지층에서 표토를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생각이 신선도를 잃어버리면, 상해서 싱크대에 버려지거나 냉동실 행으로 향한다. 요즘 내게 새로운 생각의 신선도가 많이 떨어져 버렸다. 우선 냉장고 문을 너무 자주 열고 닫는다. 또한 새로운 생각을 너무 오래 묵혀둔다.


새로운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일상의 분주함을 걷어낸다. 우선 무의식적으로 만지게 되는 스마트폰 보기를 줄인다. 새로운 생각의 신선도를 떨어뜨리는 가장 큰 위해행동은 바로 스마트폰과 같은 일상의 분주함이다. 오래 묵혀두지 않기 위해 새로운 생각은 그 때 그 때 마다 즉시 마시거나 요리한다. 음식물 쓰레기로 버릴 바에는 아무래도 바로 먹는게 제일 상책이다. 또한 새로운 생각은 냉동실로 보내지 않기로 결심한다. 냉동실로 보내지는 새로운 생각은 거의 90%가 잊혀지기 마련이다. 냉동실 공간만 잔뜩 차지할 바에는 차라리 아깝지만 버리는게 더 나을 수 있다.


오래된 생각은 오래 묵혀도 좋은 생각과 어쩌다 보니 오래 묵혀둔 생각으로 구분된다. 내게는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해둔 생각들이 있다. 생각을 더해 갈 수도록 새로운 생각들이 덧입혀지는 진국과 같은 생각들이다. 이런 좋은 생각들은 열에 하나 정도된다. 열에 아홉은 새로운 생각을 냉장고에 두게 되어 뒤칸으로 밀려버린 씁쓸한 생각들이다. 언젠가 꺼내서 먹어야 마음을 먹게 되지만, 유통기한을 넘기거나, 어쩌면 상해버린 생각들로 즐비하다. 상해버린 생각들을 오래된 생각이라 애써 외면한다. 다시는 꺼내 먹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까운 마음에 늘상 냉장고 공간의 50%이상을 채우고 있는 생각들이다. 오늘만은 오래된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다. 아깝다고, 다시 먹을 수 있다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하나씩 하나씩 버린다. 그래야 진짜 오래된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이지만, 진국인 오래된 생각을 세상에 꺼내본다. 어쩌면 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과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오래된 생각이 늘 맛있는 법은 아니다. 오래된 생각이 새로운 생각보다 영양가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단지 오래된 생각은 새로운 생각이 묵혀지고, 덧입혀진 유화와 같다. 덫칠로 칠해진 질감이 색깔과 더불어 도드라져 보이게 된다. 사람들은 오래된 생각보다 새로운 생각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내게 있어 오래된 생각은 덜 읽혀지고, 덜 회자되어도 내겐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내겐 가끔 오래된 생각을 다듬고 또 다듬어서 꺼낸다.


마지막으로 기발한 생각이다. 아주 가끔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기발한 생각을 떠올린다. 평소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래서 기발한 생각을 발견하게 되면, 무척 설레인다. 하루종일 기발한 생각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고민한다. 하지만 늘상 기발한 생각을 떠올릴 순 없는 법이다. 아무리 샤오롱바오가 맛있다고 해도, 맨날 며칠 샤로롱바오를 먹을 순 없는 법이다. 우리의 밥상에 늘상 오르는 건 단촐한 쌀밥, 김치, 멸치볶음, 김이다. 기발한 생각은 내게 아주 특별한 기쁨을 주곤 한다. 하지만 늘상 그 특별함에 매료되어 특별한 밥상만 만들 순 없는 법이다. 하지만 늘상 먹지 못하는 기발한 생각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요즘 들어 기발한 생각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이제는 굳어버린 머리와 관성대로 살고 있는 반복적인 일상 탓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기발한 생각은 "원래 알고 있거나, 늘상 보왔던 광경"을 재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생각의 냉장고 앞에 섰다. 내겐 새로운 생각, 오래된 생각 그리고 기발한 생각이 놓여있다. 일단을 냉장고 정리부터 하고, 새로운 생각 한 모금을 마셔야겠다. 냉장고 맨 아랫칸에 기발한 생각은 이제 하나도 없다. 냉장고에서 꺼낸 오래되고 상한 생각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 마지막으로 맨 위칸 젤 구석에 있는 보배같은 오래된 생각의 단지를 열어서 한 스푼을 그릇에 옮겨 담는다. 이제서야 생각의 냉장고에 서서, 생각들을 정리하고 앞으로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설레인다.


P.S 생각의 냉장고 앞에 서서,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오늘은 아무 것도 꺼내지 못한 채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꺼내보지도 못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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