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향곡 : 2악장 모래놀이

아이의 모래놀이에서 문명을 보다.

by 정윤식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두 아이가 바닷가에 나가자고 난리다. 아이 둘을 데리고, 숙소와 5분 거리에 있는 협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 바닷가에는 피서객들을 위한 파라솔 정리와 해변가 청소하시는 지역 주민 외에는 9살 아들, 7살 딸 그리고 나 밖에 없었다. 해변에 밀려온 해조류를 긁어내시던 토박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시는 대화를 얼핏 들었다. 간간히 들리는 "은,는,이,가" 조사 외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얘기는 거의 없었다. TV 프로그램이라도 보고 있었으면, 자막이라도 나올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만 들었다. 제주도는 야자수, 에머랄드 빛 바다, 쏟아지는 햇빛으로 이국적인 기분이 들게 만든다. 거기에 더해, 분명 한국말인데, 듣고는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말을 듣고 있자니, 남태평양 어느 섬에 와 있는 기분이 실제로 들었다.


왜 이리 아이들은 모래놀이를 좋아할까? 이내 두 아이는 모래놀이 삼매경에 빠졌다. 밤새 눈 내린 들판 위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 기분으로 아이들은 파도 외에는 인간의 흔적이 전혀 없는 모래를 파기 시작했다. 포항 바다와 달리 제주 바다는 조석 간만의 차이로 9시가 넘어가자 바닷물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눈 앞에서 모래를 파고 있다가,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덧 바다는 빠져나가고 모래가 점점 모습을 들어낸다. 특히 9살 아들은 웅덩이를 만들고, 웅덩이에 있는 바닷물에 물길을 내는 걸 특히나 좋아한다. 대개의 아이들이 크고 단단한 모래성을 쌓길 좋아하는 반면, 민우는 최대한 길게 물길을 내어 인공수로를 만든다. 물길은 그냥 모래를 판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위와 아래의 단차가 있어야 하고, 중간중간 물길이 이어져야 한다. 민우는 거창한 물리적 지식 없이도, 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경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체험적으로 아는 듯 하다.


그 옆에 7살 딸은 물이 흐르는 이치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옆에서 손가락 굵기만한 수로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위아래 단차가 없어서 물이 흐리지 않는다. 물길을 돌리고, 물길을 합쳐서 웅덩이에 있는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모래놀이를 2시간 넘게 하고 있었다. 11시쯤 되자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햇빛도 점점 강렬해졌다. 50미터 이상 빠져버린 바닷물은 어느 새 점점 밀려 들어왔다. 모래놀이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뒤늦게 합류한 아내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점심은 근처에 있는 샤브샤브 식당으로 향했다. 단체 중국인을 타겟으로 새로 지은 식당인 듯 했다. 메뉴판은 중국어가 기본이었고, 종업원도 중국사람인 듯 했다. 오전에 바닷물이 빠져버린 해수욕장 마냥, 식당은 중국인들이 빠져버려서 한산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하는데, 중국과 한국을 잇는 물길은 닫혀있다. 7살 딸아이가 만들어놓은 손가락 굵기만한 물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 낮 뜨거운 햇볕을 피해 우리는 드디어 오픈카의 뚜껑을 열고 달려보기 위해서 1100도로를 일주했다. 그리고 4시쯤에 협재해수욕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느새 밀물이 되어서 해수욕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오전 내내 그렇게 만들었던 수로는 사라지고 없었다. 3시간 넘게 만들었던 모래놀이의 흔적인 파도에 휩쓸려 그 어느 것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자연의 이치였다. 아이들은 모래놀이 대신에, 바다에 뛰어들어 갔다. 파도타기도 하고, 물장구도 쳤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난 뜬금없이 인류의 문명을 생각했다.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다르게 찬란한 문명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달로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화성에 이주하는 꿈도 꾼다. 하지만 인류가 고생하며 쌓아놓은 문명도 결국 아이들의 모래놀이와 비슷하다는 허망한 생각을 했다. 지구가 생긴 이래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라는 것도 찰라의 순간에 불과하다. 파도가 빠져나간 자리에 모래성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또 다시 파도가 밀려들어오면 그 모래성은 바닷에 잠기어 버린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대단해 보여도, 자연이 일으키는 지진, 쓰나미, 화산폭발, 태풍에는 속수무책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밀물이 차서 문명도 흔적없이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허망해 보이는 아이들의 모래놀이에서 문명을 보았다. 문명이 허망한 것만은 절대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흘러가게 수로를 만들고, 삶이 이어진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오전의 모래놀이는 그 자체로 재미있고 행복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문명을 쌓고 있다. 언젠가는 각자의 문명이 사라지는 날들이 오게 된다. 그렇더라도, 각자의 문명 앞에서 우리는 열심히 모래놀이를 한다. 그리고 파도에 휩쓸려 우리가 만든 문명이 사라지는 날이 오더라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오전에 열심히 모래놀이를 한 아이들이 오후에는 더 열심히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인생의 썰물과 밀물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이룩한 문명을 끝까지 지키기 위한 노력보다는 문명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인생은 보다 풍요로워 진다.


P.S 그날 저녁 아이들은 또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집에 갔습니다. 그렇게 제주교향곡 2악장이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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