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류의 글쓰기 : 키보드에 내려앉은 입력의 흔적
1993년 공일오비의 “신인류의 사랑”이 나왔다. 이제는 벌써 4반세기가 훌쩍 시간이 지나오는 동안 신인류는 가족의 안위와 직장에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구세대 꼰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 시절에는 “당찬” 신세대의 사랑이 이제는 그저 그런 빛바랜 연애담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신인류의 글쓰기를 얘기하려 한다. 내 책상에는 회사에서 지급한 17인치 노트북이 거치대에 놓여 있고, 업무의 효율성(이라 읽고, 노안으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서 구입한)을 위해 24인치 모니터가 놓여있다. 보고서를 작업을 많이 해서, 사무직의 필수품은 키보드와 마우스도 별도 구매한 제품을 쓰고 있다.
키보드는 로x텍 K780 모델인데, 어느 날 키보드에 내려 앉은 먼지를 닦아내다가 눈에 들어오는 현상이 있었다. 유달리 맨들맨들한 키보드 세 개가 눈에 띄었다. 바로 Back, Space 그리고 Enter 키였다. 그 다음이 오른편에 있는 Shift키쯤 되었다. 구인류의 글쓰기는 원고지 위에 손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1980~90년대 드라마를 보면, 남자 주인공이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장면을 보면, 항상 쓰다만 구겨진 종이가 있었다. 하지만 신인류의 글쓰기는 책상 앞 컴퓨터에서 아래아한글이나 MS워드를 작성하고 있다. 물론 회사에는 MS 파워포인트를 가장 많이 쓰긴 하지만, 글을 써내려가는 행위는 종이에서 키보드로 변화하였다.
키보드로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쓰는 키가 Back키이다. 생각은 항상 ㄱㄴㄷㄹ과 같은 자음과 ㅏㅑㅓㅕ와 같은 모음으로 이루어진다. 오자를 고쳐쓰거나, 문맥이 어색할 때면 항상 Back키를 쓴다. 또 여기에 쓴 문단이 어색하여 다른 문단으로 옮길려면 Ctrl+x와 Ctrl+v로 간단하게 바꿀 수 있다.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쓰는 키가 Back키라는 사실은 많은 걸 시사한다. 내가 생각하고 느낀 감정이나 논리적 구성은 늘 Back키를 만난다. 한글자, 한문장, 한문단이 다듬어 진다. 내가 뱉은 말 한마디는 주워 담을 수 없지만, 내가 쓴 한 글자는 늘 Back키로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신인류의 글쓰기는 고쳐쓰는 수고로움이 훨씬 쉬워졌고, 훨씬 간편해졌다. 그리고 언제든지 고쳐쓸 수 있는 편안한 Back키 앞에서 겸손을 배운다. 내 생각은 언제나 고쳐 쓸 수 있고, 다른 이의 의견에 다시 쓰여질 수 있다. 반들반들한 Back키를 보며, 내 머리속을 스쳐지나간 수많은 자음과 모음이 지워져갔고, 문장들이 고쳐써졌다.
두번째 반들한 키는 바로 Space키이다. “문장을이렇게쓸수도있지만”, “문장을 이렇게 쓸 수도 있는 건” 바로 Space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단어와 단어는 Space로 띄워지지만, Space가 있기 때문에 연결될 수 있다. 단어와 단어와의 간격이 중요하듯이, 인간과 인간의 간격도 중요하다. 직장과 가정의 간격도 중요하다. 우린 너무 붙어살고 있다. 치열한 경쟁의 직장의 삶이 가정의 삶과 Space로 띄워져 있지 않다. 이제 카톡, 페이스북까지 내 삶에 불쑥 들어와 버린 직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인스타그램을 정치적 망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삶이 건강하려면, Space가 있어야 한다. 아침에 커피 한잔의 여유, 저녁에 가족과의 저녁식사.. 그리고 주말이 있는 삶은 Space로 채워져야 한다.
마지막 반들한 키는 바로 Enter키이다. 단어는 연결되어 가며, 계속 글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고 한 문장을 마치고 또 한 문장을 이어가다가 언젠가 Enter키를 쳐야 한다. 인생의 Enter키는 고등학교 졸업, 대학졸업, 취업, 승진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더 중요한 Enter키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어떠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서 Enter키를 칠 수 있다. 그래서 채워진 한 문단은 나의 세계관이 된다. 그리고 늘상 난 이렇게 Enter키를 치고 한 문단을 맺는다.
키보드에 내려앉은 입력의 흔적을 보며, 신인류의 글쓰기를 생각한다. 나중에는 입력의 수단이 키보드 대신에, 어떤 입출력 디바이스가 나올지 모르지만Back, Space 그리고 Enter 키는 다른 형태로 살아남을 것이다. 난 오늘도 내 생각은 항상 고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Back), 또한 내 삶은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 더 잘 읽혀지며(Space),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바를 한 문단으로 엮어서 맺어야(Enter) 글쓰기가 완성됨을 깨닫는다. 그래야 어설프지만, 한 편의 글이 완성되고, 아무도 읽혀지지 않는 글이라도 완성된다. 난 반들반들한 키보드에 Back, Space 그리고 Enter키를 보며, 인생의 진실을 하나 알아간다.
P.S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 마지막 글쓰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